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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톨의 에스앤비투어 마라톤뉴스 제10호 및 진행상황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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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달사 댓글 0건 조회 9,481회 작성일 09-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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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앤비투어 마라톤뉴스-----S&B Tour Marathon News-----에스앤비투어 마라톤뉴스-----S&B Tour Marathon News-----


 


 





[
발췌]-연합뉴스

 


국민과 함께 달린 ‘봉달이의 발자취’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
고별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봉주는
15
일 오전 세종로 ~ 잠실 종합운동장 간
42.195km
코스로 열린 2009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0
동아마라톤대회 남자부 엘리트 경기에서 2시간1646초로
결승선을 통과, 개인 생애 40번째로 풀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

 


2008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태극마크도 이미 반납한 이봉주는 올가을에
은퇴 경기를 치를 계획이지만 완주가 필요하지않기 때문에 이 대회가 자신의 마지막 풀타임 출전 대회로 남게 됐다.20
가까이 마라톤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이봉주는 그동안 국민 마라토너로 통했다
.

 


1970
10
월생인 이봉주는 우리 나이로 불혹에 이르는 올해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마라토너로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이봉주가
처음 풀코스 마라톤을 뛴 것은 1990 10월 제71
전국체전. 만 스물을 갓 넘긴 새내기 마라토너가 2시간1915초로
2
위를 차지하자 국내 마라톤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그리고
1990
년대 한국 마라톤을 주도했던 승부사인 고()
정봉수 감독 사단에서 세계적인 철각으로 거듭났다
.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는 2시간1239초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첫 전성기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하지만
시련이 찾아왔다. 1999년에 발생한 이른바 `코오롱
사태`로 팀을 떠나고 한동안 방황해야 했다. 선수
생활의 최대 위기였다.삼성전자 육상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이봉주는
2000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720초로
한국기록을 세우며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같은 해 시드니올림픽에선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 속에
24
위에 그쳤다
.

 


가장 극적인 순간은
2001년 4월17일
105회 보스턴마라톤
.

 


서윤복,
함기용 옹의 발자취를 더듬어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권위의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귀국 직후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올림픽 우승자 못지않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번째 전성기를 보낸 이봉주는 또 시련에

휩싸였다.2001년 에드먼턴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레이스 도중 `타월`을 던졌다.
이어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는 `봉봉남매`
함봉실과 남북 동반 우승을 해냈지만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14
위로 또 좌절했다
.

 


주변에선 슬슬 은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구력과 더불어 스피드를 중시하는 추세로 바뀐 세계 마라톤의 흐름을 더 쫓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육상계에서는 하루빨리 `포스트 이봉주 세대`
이끌 차세대 주자를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봉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라톤 후배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하는 국내 현실에서 그냥 포기할 수도 없었다
.


 


좀처럼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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