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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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1회 보스턴마라톤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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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용찬 댓글 3건 조회 27,909회 작성일 07-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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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마라톤 참가기

- 보스턴의 하늘은 활짝 열렸습니다 -


▲ 희망, 번민 그리고 흥분의 장
잔뜩 지뿌린 4월 16일의 새벽녘,
바람소리가 음산한 울음을 토해냅니다. 창가로 가 커튼을 열어 제치니 바람에 무동 탄 비가 마 귀처럼 히죽대며 춤을 춥니다. 폭풍우 같은 수준의 비바람이 밤새 불어 닥쳤습니다.
‘오늘이 그렇게도 간절하게 기다려온 제 11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인데......’
쉐라톤 콜로니얼 호텔에서의 아침은 그렇게 보스턴 마라토너의 가슴을 파 박치며 열렸습니다.
악 기상으로 인해 대회 자체가 취소되면 어쩌나 하고 새가슴으로 지난밤을 설쳤습니다. 경주도 못하고 이대로 귀국하게 되면 여간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추위와 비바람도 괜찮으니 부디 대회만이라도 열리게 되길 몇 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13일 새벽부터 시작된 대전에서 서울 - 나리타 - 디트로이트 - 뉴욕 - 보스턴으로 이어지는 30여 시간의 육로와 하늘 길 여정으로 몸은 이미 피로에 젖은 상태입니다. 게다가 13시간의 시차는 예민한 우리네 마라토너들에게는 또 하나의 커다란 적입니다.

06시 40분, 숙소를 나서서 버스로 대회장으로 이동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연거푸 하품이 터집니다. 기온은 영상 4℃, 비바람까지 불어 한층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보스턴 마라톤 111년 역사상 두 번째 악 기상이라는 아침 방송보도도 있었습니다.
대회장인 홉킨톤 광장에는 08시 쯤 도착했습니다. 벌써 대회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진행요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합니다.
비바람 부는 대회장 주변에서 거의 벌거벗은 복장으로 한 시간 가량 떨다보니 벌써 허벅지가 굳어져 옴을 느낍니다.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굳어진 근육을 풀고, 서둘러서 짐을 물품보관차량에 맡깁니다.
10시 정각에 많은 선수들의 뒤를 따라 대회 출발지점으로 이동합니다. 이 시간엔 엘리트 선수와 기록이 우수한 마스터즈들은 1그룹으로 편성(wave 1)되어 이미 스타트한 상태입니다. 나는 후속그룹인 2그룹(wave 2)의 13번 표지판이 세워 져 있는 곳에 자리를 틀었습니다.
아아, 마침내 나는 유서 깊은‘제 111회 보스턴마라톤 대회’의 출발선에 선 것입니다. 보스턴마라톤을 동경하며 과연 내게도‘보스턴의 하늘은 열릴 것인가’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기다려온 3년!
이제는 희망이 아닌 달성해야할 목표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간밤의 번뇌의 쓰라림은 홀연히 사라지고 흥분으로 가슴이 파 박칩니다.

2만 4천명이 넘는 참가자 중 여성주자들이 절반을 넘을 듯 보여 집니다. 60대 이상의 남녀 주자들도 상당수입니다. 그들 모두의 표정이 밝고 자신감에 넘쳐 납니다. 경주에 대한 우려와 비장함 같은 모습들은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경주보다는 마라톤 축제 자체를 더 즐기는 듯한 모습들입니다. 그런 그들 속에 내가 섞여 있으니 내 마음도 한결 밝아집니다. 어느새 추위와 비바람 따위는 의식도 못하고 따사로운 그들과 하나가 됩니다.
뜻밖에도 출발선상의 왼쪽 언덕에는 ‘보스턴 장로교회’라는 한국어로 된 교회가 장엄한 모습으로 대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너무도 반갑고 기쁩니다. 유서 깊은 보스턴마라톤 대회장 스타트라인에 우뚝 서있는 우리 한인들의 교회! 순간 조국 대한민국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힘과 용기가 솟아납니다.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기 모인 모든 주자들이 아무런 탈 없이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 스타트 ~ 5km(무조건 땅만 보며 달리자)
10시 30분, 2그룹의 출발 총성이 울리자 모두들 일제히 함성을 터트리며 급격한 내리막길을 힘차게 달려 나갑니다. 비를 뚫고 바람을 뚫고 역동적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 장관입니다.
오버 런 방지를 위해서라도, 내리막을 달리다 다리 근육통이 발생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초반 5키로는 천천히 달리겠노라 다짐하고 맹세하고 결심하며 달립니다. 그러나 후미의 주자들은 빠른 속도로 마치 파도가 덮쳐가듯 나를 추월해 내달립니다.
주로 변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어린아이들까지 나와 피켓을 흔들고, 물병과 과자를 건네며 요란스레 응원하는 모습 정말 감동적입니다.
신기하게도 몰아치던 비바람이 잦아들더니 3키로 지점에서 그칩니다. 5키로 지점까지 흥분을 억제하며 달려왔습니다. 응원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도 보여줍니다.
땀이 솟기 시작합니다. 실장갑을 벗어 던진 다음 얼마 못가서 엑스포장에서 구매한 바람막이 옷마저 벗어 던집니다. 이제 복장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더 이상은 벗어 던질게 없는 셈입니다. 차가운 공기가 온 몸으로 감겨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25분이 소요되었습니다.

▲ 5km ~ 10km(서서히 페이스주로 가져가자)
무리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페이스를 확인합니다.
가끔 골짜기 바람이 불어와 페이스를 멈칫거리게 하지만 별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구불구불한 주로, 언덕과 내리막, 아름다운 가옥과 호수, 맑은 공기, 친절하고 열성적인 주민들의 응원, 이 모두가 최고의 대회임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길이 1947년 서윤복 선수, 그리고 2001년엔 이봉주 선수가 달린 그 길입니다. 그들은 각각 이 대회 우승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감동의 선물을 바친 영웅들입니다.
주로상의 거리표시는 1마일 단위로, 체크 포인트는 매 5키로 마다 되어있습니다. 거의 2마일마다 급수대가 설치되어있고, 간이화장실도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왼쪽 허벅지에 미미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이미 축적되어있는 젖산이 꿈틀대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땐 그저 달래는 수밖엔 없습니다. 무리한 스피드를 지속하다가는 근육이 터질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손바닥을 펴서 몇 차례 가볍게 허벅지를 두들기며 달리다보니 약간 진정되는 듯 합니다. 그럭저럭 달려 나와 10키로 통과시간 50분을 가리킵니다.

▲ 10km ~ 하프(페이스 주 돌입)
무릎 상태를 보건대 아직은 레이스 페이스를 올리기엔 걱정이 됩니다. 매 키로 마다 5분 목표로 계획을 수정합니다. 욕심을 버리니 갑자기 흐렸던 하늘이 훤하게 걷히는 듯합니다. 레이스도 가볍습니다. 마음속의 긴장을 걷어버리면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어 즐거움으로 승화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가끔 우리 대한민국 주자들을 만납니다. 모두들 밝은 모습으로 보스턴의 아름다운 자연과 열광적인 주민들의 극성들을 만끽하며 달리고 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펀런’을 외치며 달립니다.
마침내 그 유명하다는(?) ‘웰슬리 대학교’ 고개를 넘습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만치는 않은 언덕입니다. 숨이 턱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겨우 고개 정상에 도착합니다. 역시 소문대로 여학생들의 광기에 찬 응원이 대단합니다. 학생들 앞을 지나치는 순간 학생들이 마치 달려들 듯 손들을 뻗칩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주로 중앙으로 방향전환을 하여 지나쳐갑니다. 물론 손을 흔들어 주면서 말입니다. 하프 통과기록이 1시간 46분입니다. 페이스 조절에 스스로 만족합니다.

▲ 하프 ~ 30km(페이스 이어가기)
‘웰슬리 대학’을 지나 페이스를 약간 늦추며 숨을 몰아쉽니다. 언덕을 오르느라 조금은 오버했던 것 같습니다. 팔을 내려뜨려 가볍게 흔들고, 목도 좌우로 흔들면서 고개를 내려가니 한결 몸이 가뿐해짐을 느끼면서 정상호흡으로 돌아옵니다.
25키로 지점에서부터 주자들의 지친 표정 역력합니다. 이 지점에서 장신의 서양주자 두 명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상태로 5키로 구간을 동반 주 하는데 성공했습니다(ㅎㅎ). 30키로 통과시간 2시간 38분!

▲ 30km ~ 40km(극기와의 투쟁)
대부분의 마스터즈들이 이 지점부터 에너지가 고갈되어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을 하는 구간입니다. 32키로를 지나면 긴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달리다가 심장이 터져버린다는 이른바 죽음의 언덕인 ‘Heart Break Hill`입니다. 사전에 코스 정찰을 못해본 나로서는 일단은 걱정이 됩니다. 허리를 약간 숙이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를 하고 숏 피치로 주파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중년의 서양 여성이 내 곁에 바짝 붙습니다. 어려운 구간이라 인사도 없이 지면만 내려다보며 달립니다. 주자들이 하나 둘 걷기 시작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 여성 주자들이 기관차처럼 추월해 갑니다. 그들의 넘치는 파워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심장을 감싸고서 약간 느린 페이스로 언덕을 넘습니다. 그러나 우려했던 만큼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습니다.
여성주자와 말없는 신경전을 벌이며 달리는 동안 어느새 죽음의 언덕을 넘어 섰습니다. 순간 앞이 탁 트입니다. 시야에 와 안기는 넓은 평야와 마을들이 환상적으로 하늘거립니다.
35키로 지점을 지나치는데 뒤에서 “코리아 파이팅!”이라는 여성의 응원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반갑고 정겨운 목소리입니까. 3시간 가까이 달려오는 동안 처음 듣는 조국의 목소리입니다. 고개를 돌려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손을 높이 높이 흔들어 그녀에게 답합니다. 이국에서 만난 우리 민족이, 생전 본적도 없고 인척도 못되건만 언어 한가지만으로도 금 새 마음이 하나 되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저며 오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37키로 지점에서도 40대 아저씨와 50대 아주머니께서 주로로 달려들며 ‘대한민국 화이팅’을 외칩니다. 아! 나는 어느새 감동을 품에 안고 달리고 있습니다. 뺨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결코 땀이 아닙니다. 피보다도 더 진하고 맑은, 그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이젠 허기도 잊습니다. 양쪽 허벅지의 근육이 젖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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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권은현님의 댓글

권은현 작성일

안녕하세요? 김용찬선생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에게까지 느껴집니다.

완주를 축하드리며...목표달성 하신 것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더욱더 노력하고 발전하는 에스앤비투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림이님의 댓글

달림이 작성일

후기를 읽고 나니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이 느껴집니다.저는 언제쯤이나 보스턴에서 뛸 수 있을까요.

뽀빠이님의 댓글

뽀빠이 작성일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느낌입니다

대한민국의 사람만이 가수있는 긍지와 자부심을 진심으로 느꼈읍니다.. 112회에 신청한 달림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