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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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소비에트 연방의 심장 모스크바를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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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배 댓글 3건 조회 30,035회 작성일 18-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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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필자 박성배(57) 씨는 40대 중반까지 등산 마니아였다가 홧김에 마라톤 동호인과 벌인 하프마라톤(2005) 내기에 이기면서 마라톤 마니아가 됐다. 2007년에 서브3를 달성했고 2010년엔 보스턴마라톤 참가를 계기로 세계 5대 메이저 마라톤 서브3완주 도전을 시작했다. 같은 해 베를린마라톤과 뉴욕마라톤, 2011년 런던마라톤과 시카고마라톤에서 모두 서브3 기록을 달성해 도전에 성공했으며 한국기록원으로부터 한국 최초임을 인증 받았다(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사례는 없음). 이후 기 완주한 도쿄마라톤이 메이저대회에 편입되면서 세계 6대 메이저 마라톤 완주자가 되었다. 현재는 ‘전 세계 골드라벨 마라톤 서브3 완주’를 목표로 세계 각지를 누비는 중이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시간 45분 48초다.



지난 10여년간 도전해온 ‘전 세계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는 영원히 미완의 도전으로 남을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지난 후기에도 설명했듯이 해마다 새로운 골드라벨 대회가 생기고, 또 기존 골드라벨 대회 자격을 상실하기도 해서 도전의 범위가 명확치 않다. 게다가 내가 20대 청년이면 모를까 이미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마당에 기약 없는 도전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여유 있는 마라톤을 해볼 생각이다.


 



 


낙후된 러시아는 옛말, 몰라보게 바뀐 모스크바




올해 모스크바마라톤(9.23) 참가를 결정한 것도 그러한 심경 변화의 영향일지 모른다. 예년 같으면 골드라벨 대회를 우선적으로 검토했을 텐데 올해는 국내 마라톤투어 회사에서 처음으로 상품을 만든 모스크바마라톤이 눈에 딱 들어왔다. 적지 않은 세월동안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그 유서 깊은 도시의 한복판을 질주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추석 연휴기간에 열리는 대회인데도 기꺼이 참가신청을 한 한국 동호인이 39명이나 됐다. 목요일에 출국해서 일요일 대회에 참가하고 당일 비행기로 월요일에 귀국하는 5일짜리 일정을 택했다.


 


현지에 도착해서 이틀간 관광코스를 둘러보는 동안 나는 적잖이 놀랐다. 사업을 할 때 수십 차례 방문한 도시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 딴판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5년 전만 해도 거리에 신형 자동차가 드물었고 건물도 노후화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세련된 신차들이 주로 보이고 신도시가 조성돼 높은 빌딩들이 즐비했다. 소련 연방 붕괴 후 사업차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만 해도 ‘길거리에 함부로 나가면 마피아에게 총 맞아 죽는다’는 흉흉한 말들을 들었는데…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번영의 길로 들어서는 러시아 경제의 면모가 엿보였다.


 


월드컵경기장 부근에 마련된 마라톤 엑스포장의 규모도 상당했다. 다른 세계 유명 마라톤 못지않게 구색을 갖춰놓았고 볼거리도 풍성했다. 번호표를 수령하고 엑스포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곧 모스크바 중심가를 뛴다는 게 점점 실감이 났다. 이전 해외대회처럼 서브3 달성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서브3 100회 완주 달성 이후로 기록에 대해선 상당부분 내려놓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정도 기록이 나올지 궁금하기는 했다. 얼마 전 둔내로 이사해 전원생활를 시작하면서 여러모로 신경 쓸 것이 많아 운동량과 강도가 대폭 줄었다. 10~12km 조깅을 주5회 실시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출국하기 전 참가한 국내대회 하프코스에서는 킬로미터당 4분 페이스가 가능해서 조금 어리둥절했었다.


 



 


보슬비에 갑자기 찾아온 추위… 4겹 껴입고 스타트


 


레이스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안고 출발선에 섰다. 요즘 모스크바 날씨는 예전과 달리 온화해서 기온이 한국과 비슷한데, 대회 당일엔 비가 와서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싱글렛 경기복만으로는 도저히 레이스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급히 한국 참가자에게 낡은 반팔을 빌려서 싱글렛 위에 덧입었다. 그걸로 추위가 막아지지 않아서 베를린마라톤 기념 점퍼를 입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웜업용 비닐을 뒤집어쓰니 그제야 견딜 만했다. (요즘 모스크바 날씨는 예전과 달리 온화해서 기온이 한국과 비슷하다. )


 


내가 속한 A그룹의 다른 주자들은 대부분 하늘거리는 싱글렛 한 장만 입고 출발선에 서 있었다. 그들 눈에는 네 겹이나 껴입은 내가 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아마도 ‘복장 선택도 잘 못 하는 초보자가 왜 최상위 그룹에 들어와 있지?’ 하고 수군댔을 지도 모른다. 주위의 시선이 어떻든 나는 꽁꽁 싸맨 채로 출발했다.


 


풀코스 인원만 따지면 9000명 정도, 10km 주자까지 합치면 2만5000명 규모의 대회인데 상당히 질서정연하고 통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차량테러 위험으로부터 참가자를 지키기 위함인 듯 대형 트럭이 대회장과 스타트라인 쪽 주요 동선을 원천봉쇄한 모습이었다. 마라톤 코스는 주자들이 달리는 도로뿐 아니라 중앙선 맞은편 도로까지 완벽히 비운 상태였다. 교통사고 가능성을 차단할 뿐 아니라 소음과 매연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니 참가자들에겐 완벽한 주로였다.


 


대회 운영 면에선 영미권과 유럽의 메이저대회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데 줄기차게 내리는 가랑비와 바람이 문제였다. (나는 다른 러너들에 비해 더위에 강하고 추위엔 많이 약한 편이다) 4겹이나 껴입고 제대로 달릴 수가 없으니 빨리 몸을 덥히고 옷을 벗어야 했다. 7km 지점에서 일단 방풍비닐을 벗어던지고 점퍼 차림으로 달렸다. 내 근처에 점퍼를 입은 주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15km 지점에서 점퍼를 벗었다. 아직 새것이나 다름없는 베를린마라톤 기념 점퍼를 주로에 던지자니 안타까웠다. 조금 더 달리다가 반팔까지 벗어버리고야 다른 주자들과 비슷한 차림이 됐다.


 


컨디션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5km당 20분30~40초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25km 이후 언덕을 만나자 페이스가 뚝 떨어졌는데, 이후 평탄한 구간에서도 좀처럼 페이스 회복이 되지 않았다.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져서 뭉친 근육을 풀듯이 주먹으로 때렸더니 순간적으로 허벅지가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더 달리고 나서야 마비증세가 풀렸다. 그러는 사이 30~35km 구간에서 22분을 기록했다.


 



 


턱걸이 서브3, 그리고 기대치 않은 연령대별 1위의 의미



서브3 기록은 이렇게 물 건너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그렇지… 훈련양도 강도도 크게 줄었는데 기록이 그대로일 리가 있나. 씁쓸했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냥 최선을 다해 남은 레이스에 임하자는 생각만 했다. 모스크바 중심가를 샅샅이 누비도록 설계된 코스는 반환점이 많았다. 마지막 4번째 반환점을 돌아서 레이스가 종반에 이르자 내려놓았던 도전의식과 자신감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아직은 서브3 페이스메이커가 내 뒤에서 달리고 있다. 몸도 풀릴 대로 풀리고 컨디션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일찌감치 기록을 포기할 필요가 있나?


 


속으로 ‘할 수 있다’를 되뇌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힘이 남아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충분히 할 수 있다…. 몸이 조금씩 내 최면을 따라왔다. 컨디션이 서서히 살아나면서 페이스가 회복됐다. 열심히 달렸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남은 거리를 달렸다. 시계도 3시간을 향해서 재꺽재꺽 쉼 없이 가고 있었다. 3시간을 불과 52초 남긴 2시간 59분 08초에 나는 결승점을 통과했다. 마지막까지 서브3 페이스메이커에게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골인하고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55-60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내 또래의 러너들 중에서는 톱클래스임을 인정받는 셈이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만족스럽지 않은 턱걸이 서브3로 연령대별 입상을 하는 나이가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엔 서브3 페이스메이커에게 잡히지 않았지만, 맥없이 추월당하는 때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올 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나이가 들면 운동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서브3 100회를 달성하면서 인간의 몸은 사용한 만큼 닳는다는 단순한 이치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앞으로는 내 몸을 단련하는 것보다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해질 것이다. 모스크바마라톤에 동행한 한국 참가자 중 김진환 님은 82세 나이로 4시간 33분만에 풀코스를 뛰었다. 호적상 나이인 78세를 기준으로 해서 연령대별 3위 입상을 했다. 내가 그 나이가 됐을 때 그만큼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 앞에 놓인 또 하나의 도전거리다.



[마라토너 박성배의 해외마라톤 완주 기록] 


2008년   도쿄마라톤   2시간 56분 17초   골드라벨
2009년   이브스키마라톤   3시간 18분 10초(건타임) 
2010년   보스턴마라톤   2시간 58분 43초   골드라벨
2010년   베를린마라톤   2시간 51분 26초   골드라벨
2011년   런던마라톤   2시간 53분 20초   골드라벨
2011년   뉴욕마라톤   2시간 48분 58초   골드라벨
2011년   시카고마라톤   2시간 49분 21초   골드라벨
2012년   도쿄마라톤   2시간 53분 14초   골드라벨
2012년   보스턴마라톤   3시간 06분 26초   골드라벨
2012년   리우데자네이루   2시간 55분 22초   골드라벨 취소
2012년   호놀룰루마라톤   2시간 55분 13초   골드라벨 취소
2013년   샤먼마라톤   2시간 56분 52초   골드라벨
2013년   프라하마라톤   3시간 06분 23초   골드라벨
2013년   베이징마라톤   2시간 51분 14초   골드라벨
2013년   아테네마라톤   2시간 59분 06초
2014년   암스테르담마라톤   2시간 57분 30초   골드라벨 
2014년   싱가포르마라톤   3시간 04분 47초   골드라벨
2016년   파리마라톤   2시간 51분 11초   골드라벨
2016년   로마마라톤   2시간 49분 08초   골드라벨
2016년   프랑크푸르트마라톤   2시간 47분 56초   골드라벨
2017년   비엔나시티마라톤   2시간 59분 32초   골드라벨
2017년   훗카이도마라톤   2시간 58분 16초  
2017년   오사카마라톤   2시간 56분 56초   골드라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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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인효님의 댓글

이인효 작성일

사장님! 대단하십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김진태님의 댓글

김진태 작성일

선배님의 마라톤열정 기록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서 후원등 모든것이 존경스럽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섬배님과 룸메이트가 되어서 행운이었습니다.  선물 마라톤정보 평생 감사하게 생각 하겠습니다

강민옥님의 댓글

강민옥 작성일

수고 많으셨읍니다 선배님의 마라톤 열정 본받겠읍니다

차후 해외마라톤대회에서 인사드리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