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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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아테네마라톤참가기-박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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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배 댓글 3건 조회 30,087회 작성일 1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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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발상지 아테네를 달리다


필자 박성배
51세 / 리엑션엔지니어링 대표
2005년 마라톤 입문
풀코스 최고기록 2:45:48
세계 6대 메이저대회 서브3 완주(2011)
세계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 도전 중

몇 해 전부터 ‘세계 골드라벨 마라톤대회 서브3 완주’에 도전하다 보니 자연히 거대규모 대회에 익숙해져버렸다. 상대적으로 경치가 좋다거나 컨셉이 독특한 대회엔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바로 ‘아테네 클래식 마라톤’이다. 마라톤의 발상지에서 마라톤의 유래가 된 코스를 달리는 이 대회는 말 그대로 ‘마라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몸싸움도, 속임수도, 편파판정도 가능치 않은 평화적인 스포츠 마라톤이 참혹한 전쟁으로부터 유래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러너들이라면 대충 알겠지만 기원전 490년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격퇴한 마라톤 전투가 마라톤 탄생의 무대다. 당시 필리피데스라는 전령이 100리길을 달려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고 죽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서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전쟁터의 지명(마라톤 만의 마라톤 평원)이 운동종목 이름이라니, 참 묘한 역사 아닌가.

물론 전쟁의 역사는 늘 왜곡과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전령의 이름이나 달린 경로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고, 애초에 승전보를 전하러 간 전령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다 드라마틱한 승전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픽션’이 가미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 중에 필리피데스(또는 페이디피데스)라는 전령이 스파르타로 원군을 청하러 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원래 데이러너(하루종일 달릴 수 있는 파발꾼)가 직업이었던 그는 무박 2일간 무려 240킬로미터를 달려 서신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가 승전보를 전한 당사자든 아니든 당대 최고의 러너였다는 사실은 증명되는 셈이다. 원군을 청하러 가는 시급하고 중요한 일엔 가장 우수한 전령을 보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잠시 도전을 잊고 아테네로 떠났다. 모든 마라토너들의 조상이자 대 선배인 필리피데스를 만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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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팀 구성조차 쉽지 않은 아테네 마라톤 투어


아테네마라톤은 한국 러너들이 쉽게 갈 수 없는 대회다. 그리스란 곳이 워낙 멀고 직항이 없어서 단독으로 여행하기엔 비용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여행사 대표가 발 벗고 나서서 멤버를 모집했고, 결국 투어 패키지의 최소인원에 못 미치는데도 이미 모인 러너들을 위해 4박7일 여행을 추진해주었다.

11월 8일 자정이 가까운 시각 13명의 원정팀이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2시간 정도 이동해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독이 만만치 않았지만 마냥 쉴 수는 없었다. 아테네마라톤의 코스 난이도가 ‘극악’의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출국 전 평소 친분이 있는 정윤희 선수(2004아테네올림픽 출전)에게 물어보니 정말 어려울 거라며 걱정을 했었다. 저조한 역대 우승기록(남자 2시간 11분 35초가 역대 최고기록)만 봐도 기가 죽을 만했다.

일행은 마라톤의 발상지까지 온 만큼 만전을 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모두 함께 코스 답사에 나섰다. 임시로 설치한 거리표지판 대신 비석처럼 제대로 자리를 잡은 높이 1.5m 이상의 거리표지석이 먼저 눈에 띄었다. 코스는 보스턴마라톤처럼 도시 외곽에 있는 출발지에서 중심지를 향해 달리도록 만들어졌다. 해안을 따라서 오르막과 평지를 번갈아 달리는 길이 35km 지점까지 이어지므로 잠시도 숨을 고를 수가 없을 듯했다. 35km부터 결승점까지는 내리막 구간이라 막판 기록 만회를 노려볼 만하지만 마지막에 갑자기 나타나는 언덕이 지친 주자들의 의지를 꺾기 십상이었다. 만약 미리 답사하지 않고 코스도만 봤다면 십중팔구 낭패를 봤을 터였다.

코스답사 마치고 일행은 엑스포장으로 향했다. 원래 예정된 곳과 다른 장소였는데, 바로 영화 우생순의 실제 무대인 실내체육관이었다. 신들린 듯한 플레이로 질풍같이 코트를 누볐던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엑스포장의 수준 자체는 퍽 아쉬웠다. 그리스의 어려운 경제사정울 단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참가자에게 지급되는 기념티셔츠가 모자라서 일부 참가자에게 브랜드 없는 티셔츠를 나눠주는가 하면, 메인스폰서 아디다스의 홍보부스조차 구경할 것이 없었다. 그 외엔 미즈노와 푸마 등이 그나마 격식을 갖춰 부스를 오픈했고 나머지는 아예 부스를 닫아놓은 곳도 많았다. 그래도 애초에 엑스포장 운영을 하지 않는 우리나라 메이저대회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극악의 코스에서 필리피데스의 뒤를 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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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당일인 다음날 6시에 조식 뷔페를 먹고 7시에 호텔을 나왔다. 8시쯤 대회장에 도착했다. 마을과 떨어진 외딴 곳에 덩그러니 위치한 육상경기장이 대회장이었다. 참가자 규모는 풀코스 1만 5000명, 하프와 10km 1만2000명이었다. 세계 메이저대회에 비하면 아담한 수준이지만 제법 북적거렸다. 짐을 맡기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기온은 17도 내외로 따뜻했는데, 현지인 러너들은 제법 쌀쌀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출발시간이 임박해 내가 배정받은 B그룹으로 찾아들어갔다. 각 그룹 사이엔 인의장막을 쳐서 철저하게 구분을 해놓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 만큼 자원봉사자 수도 굉장히 많았다. 잠시 기다리다가 9시에 모든 주자들이 동시에 출발했다. 내 전략은 초반 7km를 무조건 4분 페이스로 달리고, 이후엔 언덕에서 4분 20초 평지에서 4분 페이스로 달리는 것이었다.

레이스 초반에는 게획대로 순탄하게 달렸다. 오히려 4분 안쪽으로 페이스가 찍힐 정도였다. 그런데 점점 언덕이 버거워졌다. 관광버스 창문에서 내려다본 도로 경사와 달리면서 체감하는 경사는 사뭇 달랐다. 더 가파르고 더 길었다. 첫 5km 통과 기록이 19분 37초, 10km 통과 기록은 41분 08초로 찍혔다. 다음 5km도 21분 정도에는 통과했다. 그러나 20km 지점을 향해 가는 동안 페이스가 떨어졌다. 하프 지점을 통과하며 시계를 보니 1시간 27분 15초였다.

후반부는 더 힘들었다. 레이스가 잘 안 풀리니 하프 지점에서 탄수화물 보충제(내게 잘 안 맞는 일본 브랜드를 나눠줬다)를 무심코 집어먹은 것도 후회가 됐다. ‘그냥 가지고 있던 미국 제품을 먹었어야 했는데… 왜 내가 그걸 짜서 먹었을까?’ 평소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인데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국에 돌아가서 무슨 핑계를 대야 하나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레이스가 한참 남았는데 마치 서브3 실패가 기정사실인 듯 약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포기하려던 마음 다잡고 ‘나는 러너다’ ‘나는 러너다’


32km 지점을 2시간 17분 40초에 지났다. 어떻게든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급수대 부근에서 탄수화물 보충제(내가 챙겨간 미국 제품)를 꺼내 먹었다. 처음 먹어보는 레몬맛이 갑자기 지친 나를 환기시켰다. ‘어라? 이거 맛이 괜찮네…’ 기분 전환이 되면서 갑자기 힘이 솟는 듯했다. 물론 보충제가 삼키자마자 효과를 발휘했을 리는 없다. 분명 심리적인 영향일 뿐인데도 기운이 살아나면서 부정적인 생각도 순식간에 옅어졌다.

마침 내리막 구간이 시작됐다.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해보니 분발하면 턱걸이 서브3가 가능할 것 같았다. 자동차 기어를 바꾸듯 속도를 4분 페이스로 다시 끌어올렸다. 의욕을 잃고 흔들리는 사이 추월해간 주자들을 다시 하나 둘 따라잡았다. ‘명색이 세계 6대 메이저대회 서브3 완주자고 그 얘기로 책까지 냈는데 쉽게 포기할 순 없지. 더구나 마라톤의 발상지까지 와서 말이야…’ 염불하듯 ‘나는 러너다’를 속으로 되뇌며 남은 힘을 쥐어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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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피니쉬라인이 있는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여행안내책자에 나오는 길쭉한 모양의 근대올림픽경기장. 그 낯선 트랙을 반바퀴 돌아서 결승점을 넘었다. 2시간 59분 06초. 아슬아슬했지만 마지막엔 침착하게 마무리한 턱걸이 서브3였다.
나와 기록이 비슷한 일행이 곧 올까 싶어서 피니쉬라인 근처 펜스 구석에 앉아 기다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참으로 감회가 남달랐다. 관광객으로 찾았을 땐 대충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던 곳에서 운동화를 신고 서있다니. 러너가 아니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갑자기 감정이 끌어올랐다. 마치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도약선수처럼 관중들에게 박수를 유도하고 다른 참가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최대한 천천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위대한 러너이자 대선배인 필리피데스도 전쟁터가 아닌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의 감격을 맛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쟁의 비극 속에 한 명의 러너가 죽고, 그 죽음으로 인해 마라톤이란 스포츠가 탄생하다니……. 오묘한 역사를 되내이며 이날의 페이스메이커는 필리피데스였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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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영수님의 댓글

장영수 작성일

잘계시지요?

아테네마라톤 룸메이트 "장영수"입니다

그때의 감동들이 되살아납니다

앞으로 국내외 여러대회에서 자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건강하세요

안정자님의 댓글

안정자 작성일

6대 메이져 서브 3  완주자  박 대 표 사장님  저서  정말로  감 명  깊었습니다. 또 좋은 일 로 꿈나무 육상 학생들에게도 많은  헌신과 봉사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밤톨님의 댓글

밤톨 작성일

역시 "짱"이십니다.  서브3 하려면 몸매가 이정도는 되어야겠지요... 제 핸드폰 성능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