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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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단동 압록강마라톤 및 백두산 탐방기(제1편 단동 압록강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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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일 댓글 2건 조회 22,095회 작성일 12-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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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압록강 마라톤 달림이 벗님들께
안녕하십니까?
늦게나마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감격스런 압록강 마라톤과 성스런 백두산을 다녀온 지 한달이 지나서야 정신을 좀 차리고 사진들도 정리하여 웹진에 2차례(1차는 마라톤 주로 백두산천지 일부 70여장, 2차는 대련↔백두산 천지 왕복사진 150장) 올리고 여행 중 단상을 기행문 형식으로 이렇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3박4일간의 빠듯한 일정에 대련서 백두산까지 왕복 2천km 5천리를 다녀왔으니 완전 주마간산격이라 이번 여행기는 주로 제가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우리의 고대사와 중국의 동북공정 및 백두산 정계비에 관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읽기에 부담될 내용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평소 여행은 가기 전후의 독서등을 통한 간접경험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역사는 매우 중요하며 오늘을 살아가는데 좌표가 됩니다. 특히 근래 미국과 더불어 G-2시대를 여는 중국의 부상으로 우리에겐 중국은 너무나 중요하고 통일의 대상인 북한 문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나라이므로 공부를 많이 해야 할 대상입니다.
저의 2편의 글이 주관적인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니 지난 10여년간 5-6회 만주쪽을 역사 탐방한 저의 결과물이기도 하니 시간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 이어 이미 다른 매체에 올렸던 만주기행 2편과 베를린· 부다페스트마라톤 기행을 올릴 예정이니 기대하십시오.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첨부: 단동 압록강 마라톤 및 백두산 탐방기 중 1편

2012. 7.
변호사 박용일

2012. 5. 단동 압록강마라톤 및 백두산 탐방기
(제1편 단동 압록강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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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압록강 백두산등 만주땅을 향하여
지난 5.26.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단동의 압록강 국제마라톤에 참가하고 백두산 천지를 다녀온 몇가지 단상을 전하고저 합니다.
위 압록강 마라톤은 올해로 제7회인데 첫대회부터 이번 여행을 주선한 에스앤비에서 단동시와 함께 주최하여 우리나라의 180여명등 참가인원은 12000여명이고 국제마라톤 대회답게 케냐등 아프리카의 엘리트 선수들은 물론 유럽인들도 4-50명 참가하였습니다.
특히 북한(평안북도)에서 학생선수들과 일반인등 20여명이 참가하여 마라톤 대회에서 한민족인 그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대회였습니다.
저는 지난 가을 베를린·부다페스트 연속 마라톤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태극기대신 통일한국을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가슴에 달았으니 남다른 감회가 들었고 가뜩이나 탈북자문제등으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경색되어 있는 이때에 우리같은 민간인교류가 중국은 물론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참가자들은 몇팀으로 나뉘어 단동으로 집결하였는데 저는 늦게 신청하여 대련행 비행기편팀 18명의 일원으로 버스 6호차로 동고동락하였습니다.
가이드 이창재님은 2008년 보스톤마라톤대회도 같이 간 인연이 있어 반가웠고 성악을 전공한 서비스강사인 미모의 강보경님과 신혼여행 겸 같이 와서 더욱 화기애애하였습니다.
대련의 국제공항에는 오후 1시경 도착하여 이민 3세로 우리동포인 순진하면서 재치있는 전성혜 현지가이드를 반갑게 만났고 우리차가 구공항에 잘못가서 20여분후에야 400여km 떨어진 단동으로 곧장 향하였는데 백두산까지 왕복 2000km 대정정의 출발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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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련등 요동반도의 어제와 오늘
대련은 요령성의 제일 남쪽 요동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서로는 발해 동으로는 서해 (황해)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물류와 공업도시인데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어서 우리 역사와도 멀리로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물론 가까이로는 청일, 노일전쟁 및 일제시 간도협약까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고조선에 관련하여서는 내몽고 적봉 중심의 홍산문화가 중화문명의 발상지라는 중국의 허구적인 홍산문화론과는 달리 요령성의 요하 및 혼하일대는 소위 동이족인 고조선의 영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중국의 중화족 무덤에서도 볼 수 없는 고구려 적석총과 같은 대련의 청동기시대의 강상·누상무덤들이 발굴되고 고조선 표지 유물인 비파형 동검, 미송리형 토기등이 출토된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나 고조선을 이은 기자·위만조선은 물론 한무제의 낙랑등 4개군도 그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요서지방인 중국 하북성의 난하부근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주목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구려는 이곳 대련 남단 대흑산에 해군기지인 비사성을 구축, 요하·혼하부근에서 중국의 수,당과의 대치하여 북쪽의 농안 고성(농안)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신성(무순 부근), 개모성(심양) 백암성, 요동성(요양) 안시성(해성) 건안성(영구)등 수많은 성을 쌓아 요동지방을 굳건히 지켜왔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중국의 5호 16국의 혼란기중 국력을 키워 막강한 수,당과의 전투시 을지문덕, 연개소문등 명장등의 힘으로 세계 전쟁사에 빚나는 승리를 이끈 자랑스런 우리의 역사인데 중국은 이제와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으니 뒤에 볼 `고무줄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의 동북공정의 실체 및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발해도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등 고구려인들이 말가족과 함께 건국하여 통일신라와 더불어 소위 남북국시대를 이루어 3대 대무예왕은 한민족 최고의 정복군주로서 이 비사성을 전진기지 삼아 발해를 건너 산동반도에까지 영토를 넓혀 고구려보다 더 넓은 영토에 `해동성국`을 이룬 역사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고려는 윤관의 9성을 개척한 후 두만강 너머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웠으며 최영장군의 요동정벌도 요동이 우리의 고토임을 확인코저 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근세사에서도 청일전쟁후 일본은 시모네세키(하관)조약을 통해 청에게서 요동반도를 할양받았다가 러시아등 소위 3국 간섭으로 반환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대련과 여순(뤄순)을 조차(임차)하여 급기여 러일전쟁(1904)이 벌어졌고 일본은 러시아의 요동반도조차권 및 만주철도부설권을 빼앗은 후 한반도 강탈과 만주침략으로 이어져 괴뢰국인 만주국건국, 만주사변·중일전쟁·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던 것입니다.
일제는 한반도 강탈 1년전인 1909년 간도협약으로 우리와 중국(청)이 서로 영유권을 다투어 온 간도(서 북 동)을 청나라에 넘겨주었으니 일제의 패망 후 당연히 위 간도협약은 국제법적으로도 무효이고 중국과도 간도문제를 다시 논의하여야 했으나 남북분단이후 1962년 북한과 중국간의 조중변계조약이란 비밀조약으로 압록강·두만강을 국경으로 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일제시 대련시의 서쪽 여순구의 여순감옥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옥사하고 안중근장군은 사형집행당하여 시신도 찾지 못한 우리에게 한맺힌 곳입니다.

단재선생은 어려운 망명생활속에서도 조선상고사등의 저술로 우리민족의 혼을 일깨웠고 단지동맹의 일원인 안장군은 하얼빈역에서 한민족의 원수 이등박문을 저격하고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많은 일본인들로부터도 공감을 얻어 존경도 받고 있습니다.

대련서 서둘러 단동을 향해 201번 단대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이 고속도로는 중국의 비리로 얼룩진 거물정치인 보시라이작품이라는데 그는 원래 흑룡강출신으로 대련시장, 요령성장을 거친 개혁개방주의자로 알려졌는데 권력과 비리는 어디서나 함께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대련시를 벗어나 보란점(풀란뎐)시 피구(皮口)휴계소에서 잠시 쉬고 벽류하를 지나 광하시를 접어 들었는데 위 벽류하 부근에는 특히 고인돌들이 많아 세계에서 최고의 고인돌 밀집지역인 우리 한반도와 문화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곳임을 증명해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도로가에는 자색꽃이 현란한 아카시아 나무가 줄지어 있고 방품림으로 조성된 포푸라가 끊없는 농촌풍경의 평화로움을 보여주었으며 곳곳에 모내기를 위한 물대기작업이 한창이어서 이곳이 한반도보다 북녘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고속도로를 4시간여 달리면서 가져간 `고구려 발해답사역사기행`(박혁문 정보와사람)등을 지도(요령성, 중국지도출판사)와 함께 읽으니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수당전쟁의 승리등이 정말 실감났습니다.
특히 위 보란점와 광하사이 남쪽으로 멀리 펼쳐진 광록도등 장산(長山)군도에서 벌어진 고구려 해군의 승리는 당시 안시성등 육지에서의 승리 못지 않게 고구려의 막강한 수군의 특출한 전략의 일단을 느낄 수 있었고 여행중에 갖는 독서의 묘미를 새삼 즐겼습니다.
광하를 지난 단동 못미쳐 동항(둥강 東港)까지 가면서 광하 북쪽의 수암(岫岩)행 표시가 보였는데 2년전에 가 본 수암의 웅장한 흥륭대석붕(고인돌)과 유명한 수암옥 산지의 기억이 생생하였습니다.
이 수암옥은 요서지방인 내몽고 적봉 유적과 우리나라 강원도 고성 문암리 신석기 유적의 각 옥결이 이곳 수암옥임이 밝혀져 적봉의 홍산문화가 우리와 밀접함을 알려 주는 고고고학적 증거로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3. 한반도 서쪽 끝 신도군 비단섬 마인도과 황금평
동항은 단동의 외항으로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 단동과 함께 대북한 무역의 중심지인 곳입니다.
이곳 동항이나 압록강 하구의 하이룽(海戎)에서 배로 10여분 서해로 나가면 비단섬에 도착하는데 `간도에서 대마도까지`(임채청외 동아일보사)에 따르면 이섬이 우리나라 지도에는 평북 용천군 마안도라고 표시되었지만 북한의 지도에는 평북 신도군 비단섬 노동자 마안도로, 남북 모두 우리 한반도의 서단인 마안도(馬鞍島)임을 인정하고 있는 곳인데 신도군은 압록강 하구의 여러섬을 묶어 불리어 왔다고 합니다.
이 섬은 조선 세종때의 왕조실록에도 기록된 우리땅이나 중국은 1960년대이후 중국땅(장자도)으로 주장하여 북한과 다투는 곳인데도 남북 분단으로 현재 우리에겐 낯선 곳이 되어 있어 북한 지리공부부터 더 열심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 헌법에 우리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내용을 다시 상기하면서 통일한국의 영토조항은 어떻에 되어야 할지도 아울러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신도군을 지나 단동 직전의 압록강 하구의 하중도(河中島 중국의 강심(江心) 황금평(섬)은 중국이 북한과 공동개발하려다 지난주 중국이 경제성을 이유로 개발중단을 선언한 곳입니다.
옛날부터 황금빛 벼이삭 때문에 부쳐진 이름의 비옥한 섬으로 압록강의 퇴적토로 생긴 섬들 중 단동의 위화도 (12km2) 다음으로 큰 섬(11km2)이어서 특히 주목을 받아 온 곳입니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 체결시 조사한 위 하중도의 섬과 모래톱 205개중 북한과 중국은 각 127개, 78개를 소유하기로 하였다는데 큰 섬들은 모두 북한땅이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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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단동
5시경 드디어 압록강변의 아파트등 고층건물이 늘어선 단동에 도착하여 축하만찬장으로 늦게사 갔는데 중국인들 특유의 거창하나 지루한 단동시의 각 기관장들의 소개와 인사말에 이어 푸짐한 음식과 술도 대접 받았으나 내일 마라톤을 생각하니 마음껒 먹을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식사도중 저는 이곳에 참석했을 북한동포들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만찬장이 너무 넓고 인원도 많아 식사 마치고 나갈 때 잠시 보았는데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몸집이 작은 선수들과 평안북도 체육계 인사들로 보이는 일단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여 몹시 섭섭하였습니다.

요즈음 탈북자 문제등으로 남북은 물론 중국과도 매우 불편하고 긴장된 이곳에서 마라톤으로 만난 우리라도 서로 반가워할 수 있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으나 북한 참가자들로서는 S&B가 이번 대회의 주최자이고 남쪽에서 180여명이나 대거 참석하였으니 위축되지 않을 수 없는 터이어서 S&B측에서라도 북한참가자들에게 호의를 보여야 할 것이란 생각이 절로 났고 내일 출발지와 주로에서 그들을 만나면 나라도 반가히 대해 주리라 다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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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을 마치고 숙소인 중련대주점으로 이동하였는데 17층 객실에서 내려다보니 바로 압록강대교가 중국쪽은 색색깔의 조명을 밝히고 있었으나 북한쪽 다리와 건너편 신의주는 암흑과 정적만 가득하여 가슴이 착찹하였습니다.
강변에 나가 북적이는 휘황한 단동의 밤거리와 단교 부근을 거닐려니 저 건너 북녘 동포들의 심정은 어떨까 하는 마음과 북한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곳 단동은 일제시 안동(安東)이었다가 1965년 개명한 한적한 도시인 반면 건너편 신의주는 일제가 한반도와 만주침략을 위해 경의선 철도를 개설하여 집중 개발하였는데 중국의 개혁 개방후 전세가 완전 역전되었습니다.
신의주등 북한 주민들이 이곳 단동으로 건너와 소위 탈북자가 되는 사태가 정치적 쟁점이 되어 남북간, 중국과의 갈등은 물론 우리나라 사회에서 엉뚱하게도 종북·종미문제등 첨예한 소모적인 이념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곳 단동이 우리 역사의 현장인 셈입니다.

단동의 단교는 두만강변 훈춘의 그것과 함께 한국 전쟁시인 1950. 11. 8. 미 B-29의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가 되었고 중국은 이 단교를 미군의 대륙진출을 막아낸 구국항쟁의 상징으로 보고 6. 25.전쟁도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전쟁`으로 불러 `보가위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400여년전 임진왜란때도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 명으로 가는 길을 내라는 왜의 침략을 막아내는 `항왜(抗倭)원조 보가위국`을 성공시킨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중국침략, 한국전쟁시 미군과의 치열한 전쟁 및 남북 분단과 한미일동맹 강화로 중국은 `항미, 항왜`와 아울러 `항한`까지를 염두에 둘 가능성이 높아진 셈입니다.
G20 회원국인 우리나라가 얼마전 세계에서 7번째로 2050국(1인당국민소득 2만불에 인구 5천만이상)이 되어 통일한국의 여건이 성숙되고 있고 만약 중국이 `항한원조(抗韓援朝)보가위국`을 준비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경제협력, 동북공정등으로 북한에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이는 대단히 우려되는 사태가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남북·중국관계를 호전시켜 남북통일에 필수적인 중국의 지지를 얻어야 할 것이며 북한, 중국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북한, 중국과 긴밀한 경제협력·외교등을 통해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의 긴장을 줄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녁 늦게까지 유장히 흐르는 압록강변을 서성이다 호텔에 돌아와 내일 마라톤을 위해 잠을 청하였으나 쉽게 잠이 들지 않아 창가에 앉아 단교·대교 및 강 건너 북녘을 하염없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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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압록강 마라톤 대회의 산뜻한 출발과 위화도를 지나며
긴장해서인지 새벽 일찍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압록강 다리들 일부만 희뿌옇게 들어났습니다.
5시경 간단히 식사하고 우리나라 참가자 모두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호텔서 도보로 5분거리인 대회장으로 갔습니다.
중국인들은 주로 회사별로 모여 시끌벅쩍 하였고 개막식무대 부근의 주황색 옷을 입은 남, 여성 응원단이 북등으로 분위기를 돋우고 케냐등 아프리카 선수들이 출발선 부근서 사진공세에 분주하였습니다.
저는 북한참가자들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없어 일행들과 인사도 나누고 사진을 찍다가 8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마라톤 주로는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호산산성입구까지 왕복하는 것인데 출발직후 압록강의 단교등을 지나서 시내를 잠시 들어 갔다가 5km지점에서 다시 강변으로 나와 줄곧 달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곧장 나타난 위화도는 이성계의 회군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성계는 고려 우왕때 최영장군의 요동정벌에 반대해 이곳에서 군대를 돌려 개성을 공격,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던 것입니다.
최영의 요동정벌은 요동을 우리의 역사 무대로 보아 이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성계는 그 이전인 1370년 중국이 환인현의 오녀산성(중국명 우라 于羅)을 공격해와 일시 점령한 것을 탈환한 적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회군함으로써 이후 우리 역사가 한반도로 졸아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니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강변엔 곳곳에 주민들이 나와서 신기한듯 구경 겸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우리 중국 동포들과 혹시 탈북자들도 있을지 모른다라는 생각도 하며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였습니다.

중국쪽서 위화도는 불과 몇백미터 떨어져 매우 가까운 편이었고 한곳에는 수십개의 철제 부교에 중국군인 수백명이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북한 유사시 중국군의 북한진주 작전의 예행연습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군사 훈련은 압록강은 물론 토문등 두만강변에서도 곳곳에 있을 것인데 적어도 외세인 중국군이나 미군이 더 이상 북한에 쳐들어가는 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이 앞섰습니다.

내노라하는 달림이들에 뒤쳐져 혼자서 시원한 강바람 맞고 이런 저런 생각하며 달리면서 엘리트 선수들은 물론 우리 일행들이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모습등을 사진 찍느라고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습니다.
기록보다는 완주와 행복이 목표이니 삶이 그렇듯 혼자서 쉬엄 쉬엄 달리는 것 그 자체를 즐기고 또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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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호산산성 허구적인 `고무줄 만리장성`
반환점은 단동시 관전(寬甸 쾐뎐) 만족자치현 호산진 호상촌에 위치한 `호산장성` 입구였는데 이 산성은 주로 후반부터 저 멀리로 뚜렷한 산봉우리로 이정표로 삼게 해주었습니다.
특히나 산성 못미쳐 고구려성인 구연(九連)성표지가 나타났고 이어 북쪽에서 흘러온 비교적 큰 애하(愛河)가 압록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전략상의 요충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애하 강둑에 서 있는 `영토수호`운운하는 커다란 입간판은 강 건너 북한보다는 우리 아니 한미일 3국을 겨냥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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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 호산장성을 명나라때인 1469년 탑호산성을 이곳에 만들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명나라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1990년 이 산성터에서 발견된 성터를 진·한(秦·漢) 시대의 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잘 알려진 대로 장성은 원래 전국시대부터 쌓은 고립된 성들을 진나라와 명나라때 이 성등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이 되었는데 중국은 이 1990년 중반 호산장성 복원공사를 마치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이곳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중국의 모든 사료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위 산해관에서 발해만을 건너 1000km 떨어진 이곳이 만리장성 동단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중국은 지난 6월 초순경 놀랍게도 위 거짓 주장을 공식으로 발표하였고 심지어 위 장성은 길림성 저 위쪽으로 연장되어 있다고 하여 우리 언론에 `고무줄 만리장성`이란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위 허위 주장은 물론 동북공정의 일환에서 나온 것으로 무엇보다 위 산성터가 고구려의 박작(迫灼)성의 유적임을 은폐하기 위한 것입니다.
중국 사서에도 `648년 3만명의 당나라 수군이 압록수를 100여리 거슬러 올라 박작성이라는 고구려 산성에 이르렀고 이 성에서 성주 소부손이 기병을 이끌고 나와 대항하다 무너졌으며 박작성은 산에 의지해 요새를 구축하였고 압록수가 가로 막고 있어 견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이 주장한 진·한시대의 산성터는 박작성터 임에 틀림없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시대에는 중국세력이 압록강가에 성을 세웠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반면 고구려가 압록강가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곳곳에 있습니다.
이 박작성 조사시 산성 안쪽의 큰 우물터 및 성벽의 견치석은 고구려성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이 우물에서 나온 통나무배는 서력기원 무렵의 것으로 판명되어 이 성이 고구려성임이 더욱 분명해진 것입니다.
이 배를 중국은 신비로운 배라는 뜻으로 `고정(古井)신주`라고 불렀는데 지난 2003. 3. 중국이 쏘아올린 최초의 우주선 이름을 신주라 한것도 이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여 이배가 중국에게 귀한 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에 있는 집안(集安 즙안)의 국내성을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도읍지로 삼아 압록강 수운을 이용, 주변국과 무역하였고 압록강 하구에 서안평성(중국명 애하 첨고성) 구연성 박작성, 대행성을 지어 압록강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고구려 박작성터를 중국은 명나라때 완성된 만리장성의 동단이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특히 북한을 오갈 수 없는 남녘의 우리에게 압록강과 북한땅을 빙자삼아 이곳을 관광지로 탈바꿈하였고 박물관 외벽에 한글로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고 크게 써놓아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니 분통이 터집니다.

만리장성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중국은 예로부터 만리장성을 경계로 삼아 동이, 북적등 외적의 칩입을 막아 왔다고 주장해 왔고 현재 동이·북적으로는 우리나라와 몽고만이 국가를 이루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만리장성을 조금이라도 더 북쪽으로 옮겨 놓으려는 중국의 속셈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역사왜곡의 실체이며 동북공정 이전에 서북공정등을 통해 위구르족의 신장성, 티베인의 서장(티베트)성을 중국역사에 포함시켰고 더욱이나 탐원공정을 통해 삼황오제의 오제를 실제한 왕조로 만들었으며 내몽고지역의 홍산문화를 저들 문화의 근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마라톤 코스의 반환점을 이곳으로 한 것도 이런 중국의 역사왜곡 주장을 알리기 위한 정치적 선전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허구적인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악대원들의 연주등 요란스러움은 그 속셈을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반환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속도 상하고, 뒤에 쳐져 거의 주로에 사람이 거의 없어 힘도 들어 빨리 걷듯이 달리면서도 강 건너편 북한섬의 주민들을 찾아보면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막판에는 칠마회원이자 100마라톤 회원인 김무조선생님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 김선생님 사진을 찍으면서 달리니 그래도 견딜만 하였습니다.
골인 지점에서는 제한 시간인 5시간이 20여분이나 지나서인지 한산하였고 호텔 집합시간이 지나 골인의 감격보다는 걱정이 슬슬 앞섰습니다.
이번 마라톤은 처음부터 마라톤보다는 만주에의 역사기행에 중점을 둔 것이고 백두산이 기다린다고 자위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예정보다 1시간여 늦게 우리는 차로 다시 호산산성으로 가서
먼저 성밖의 샛강가로 갔는데 샛강 건너는 북한땅 방산마을인 우적(牛赤)도 인데 큰 바위돌에 북한땅과 매우 가깝다는 뜻으로 `일보과(一步跨)` `지척(咫尺)이라고 한자로 새겨 놓고 주로 우리나라 관광객을 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나 이 부근 경고판에 `북한사람에게 음식물이나 물건을 던져주지 말라`고 적혀 있어 북한 사람을 `동물`로 바꾸면 이곳은 우리에겐 동족이 있는 사파리 관광인 셈이라는 글을 `발로 쓴 동북공정`(이정훈저 131쪽)에서 읽은 기억이 나서 이래 저래 속이 무척 상했습니다.
더욱이나 2년전에는 없던 양측의 새로운 철조망과 중국측의 군인·차량 배치는 살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는데 터키의 쿠르드족 지역을 여행하던 생각이 불현듯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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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성에 올라 보았지만 박물관은 물론 꼭 다시 보고 싶던 박작성 흔적인 견치석 성벽과 부근의 우물터도 보지 못하고 박물관 외벽에 한글로 크게 써 부친 `중국명 만리장성 동단지점` `만리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등의 문구가 눈에 가시처럼 거슬렸습니다.
후자의 `대장부 운운`내용은 모택동이 북경 부근 만리장성이 있는 팔달령에 올라 한 말임을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버젓이 이곳에 적어 얄팍한 속임수를 쓰는데 더욱 분노하였습니다.

서둘러 옮겨간 부근의 압록강 유람관광도 30분 가량 위 우적도와 부근 구리도 (북한땅)사이를 지나 북한 본토에로 가까이 갔다가 오는 코스였습니다.
양쪽 섬에는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들과 염소를 먹이는 북한 주민들등이 가까이에 보여 손을 흔들었으나 철모르는 어린 꼬만 한명만 응답할 뿐 냉담하게 대하는 바람에 멀쓱한 기분으로
`사파리 관광`이란 느낌이 더욱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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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남쪽 관광객들인지 잘 알 것이므로 농사일에 힘든 그들에게 손을 흔든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반성과 함께 고 박완서 선생이 네팔 티베트 여행시 그곳에 선 작가 자신의 존재가 `모욕`이라는 느낌을 이곳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본토쪽은 군초소등 건물과 배 접안 시설이 있고 젊은 군인 3-4명이 바로 건너 보이는데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압록강 선상 유람은 다른 곳과 달라 중국에서 북한땅을 바로 옆에 두고 지난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갖가지 상념에 젖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부근에서는 유람선 선장이 북한쪽을 사진 찍지 못하게 하였는데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이 공유하여 국경선이 따로 없는데 이곳은 일종의 샛강인 섬들 사이와는 달리 본토와 인접한 곳이라 북한이 사실상 단독소유를 주장하는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 사진을 찍으면서도 더욱 긴장감이 들었고 하루빨리 남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어 북한을 통해 이 압록강 유람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2편 `단동서 백두산천지로`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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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인효님의 댓글

이인효 작성일

박용일님!

좋은 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스앤비투어(주)

대표 이인효 올림

진광식님의 댓글

진광식 작성일

그 사이 잊고있었는데 메일보고 다시 이곳에 들어와서

그날의 기억들을 되 짚어 봅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우리것 다시한번 기억하게 해 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