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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마저 놓아버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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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달사 댓글 0건 조회 6,917회 작성일 13-0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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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마저 놓아버릴 때

안개 자욱한 서산시의 아라메길을 걸었다.
가로림만 건너편에 자리 잡은 태안을 바라보며 걷던 길,
끝없이 펼쳐진 뻘 밭과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던 작은 섬들,
나도 작은 섬이 되고 싶었다.

양길리에서 호리 항에 이르고 다시 구도항까지 이어지던 길,
그 길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 신우선씨가 내게 물었다.
“스마트 폰, 비밀장치를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하자, 그것을 풀어놓으라고 그랬다.
“아는 사람의 아들 중 스물여섯이 된 어떤 청년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곧바로 이 세상을 등졌는데, 그 비밀장치를 풀지 못해 신원 확인이 늦었다,“고,
그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르던 이야기 하나,

“어느 도시에 네 아내를 거느린 남편이 있었다. 첫째 아내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사랑하는 아내였다. 둘째 아내는 남과 싸우기까지 하며 무척이나 애를 써서 얻은 아내로서, 항상 옆에 두고 다정하게 이야기도 했지만 첫째만큼은 사랑하지 않았다.

셋째 아내는 때때로 만나서 서로 위로해 주기도 하고,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떨어져 있으면 또 그리워하게 되는 그런 사이였다. 넷째 아내는 온갖 궂은 일과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하녀나 다름없는 아내로서, 남편의 마음속에 그녀의 존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남편은 먼 외국에 갈 일이 생겼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첫째 아내를 불러서 물었다.
“이번에 먼 외국에 가게 되었소.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당신이니 나와 함께 가주겠지요?”
그러자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리 저를 사랑해 주어도 당신과 함께 외국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남편은 첫째 아내의 무정함을 꾸짖고, 둘째 아내를 불어서 물었다.
“갖은 고생 끝에 얻은 당신이니 당신은 함께 가주겠지?”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가장 사랑하시는 첫째도 가지 않는데, 제가 왜 가요?”
남편은 다시 둘째 아내를 꾸짖고 셋째 아내를 불어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했다.
“당신의 은혜를 입었으니 성 밖까지는 전송해드리겠어요. 하지만 먼 외국에까지 함께 갈 수는 없어요.”
이번에는 넷째 아내를 불어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괴롭거나 즐겁거나, 죽거나 살거나 당신의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함께 가겠어요.”

남편은 마침내 가장 천대하던 넷째 아내를 데리고 그 도시를 떠났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실린 석가 세존의 말씀이다.

이 이야기에 실려 있는 어느 도시란 사람의 세계요, 먼 외국이란 죽음의 세계다. 그 도시에서 사는 네 여인의 남편이란 인간의 영혼이다.
그 첫째 아내는 인간의 육신, 둘째 아내는 인간의 재산, 셋째 아내는 부모형제나 처자 또는 친구, 넷째 아내는 인간의 마음이다.“

이 세상을 등질 때 내게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육신도, 재산도, 부모형제나 처자, 또는 친지도, 다 무상이 될 것이고,
어쩌면 마음까지도 죽음과 함께 연기처럼 소멸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행여나 나의 뒷모습이 남의 눈에 아름답지 않게 비칠까봐,
이것 저것 정리하는 마음,

그 마음마저 놓아버릴 때 참다운 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계사년 정월 열나흘.

대표 신정일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http://cafe.daum.net/san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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