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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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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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종택 댓글 4건 조회 41,709회 작성일 12-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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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로 비행기의 이륙이 늦어지면서 밤 9시가 훨씬 지나 12시 좀 지난 시간에 KE 053 항공기는 출발하였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1시간 남짓한 거리야 별게 아니지만 벌써 여러 시간이 소요되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생각에 지루함이 앞선다. 낮에 보았던 이봉주 선수를 생각하며 좌석에 앉았다. 호놀룰루 마라톤대회는 이번이 40주년 기념으로 최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이봉주 선수를 특별히 초청하였다고 한다.

특유의 코믹한 모습의 그와 사진을 몇 컷 찍었는데 참 편안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이다.
11시가 넘어서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했다. 청명한 가을처럼 하늘은 맑고 푸르다. 여기도 지금 겨울이라는데 기온은 보통 28도 정도라고 한다. 미니버스를 타고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길가에 심어놓은 꾸불꾸불한 가로수가 장관이다. 깃털 같은 꽃이 더러더러 피어 있는데 보통 한아람 이상은 될듯하다. 자귀나무다. 우리와 달리 마디가 짧다. 기온 탓이리라.

알로하(aloha)는 하와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듣는 인사말이다. 원주민들 사이에서 사랑, 친절, 존경, 이별 등의 의미로 쓰이는데 흔히 “안녕 하세요” “잘 가세요”란 인사말로 쓰이고 있다 한다.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쭉 펴서 흔들며 “알로하”하면 된다.
하와이는 니하후, 카후아이, 오아후, 몰로카이, 라나이, 카호올라웨, 마우이, 하와이의 8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두개 섬은 군사용과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갈 수가 없고 6개 섬만 방문할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하고 있는 섬은 오하후 섬으로 하와이주의 대표적인 섬으로 제주도의 90%되는 면적이며 공장이나 제조업체가 없어 물가는 꽤 비싼 편이라 한다. 하와이섬은 빅아일랜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제일 우측에 있는 활화산 섬이다.

하와이주의 인구는 130만명 정도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 4만5천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고 일본인과 백인들이 많다고 한다. 아시아계는 일본인 다음으로 필리핀, 중국, 한국인순으로 통계가 잡혀 있다.
1778년 영국의 쿡선장이 처음 하와이주 섬 중의 하나인 카우아이섬을 별견하였다고 하며 그 후 침범한 서양인들에 의해 원주민들이 나라를 빼앗긴 결과가 되어 버렸다.

어디나 원주민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와이주도 원주민들이 9%정도를 차지하는데 이들 간에도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전투가 있었으며 최초로 8개 전 섬을 통일한 사람이 1795년 카메아메하(고독한 청년이라는 뜻) 왕이라고 하며 이올라니 궁전 앞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의 역사는 1810년 본격 시작되었고 83년간 8명의 왕이 대를 이었으며 1893년 침공한 서양인에게 정원을 내 주었는데 마지막 왕이 ‘릴리오 칼라’라는 비운의 여왕으로 거주하던 이올라니 궁전에서 항복문서에 싸인을 하였다고 한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던 이 릴리오 칼라는 ‘알로하우에’라는 노래도 작곡을 하였다고 한다. 이올라니 궁전 옆에는 수백개의 뿌리가 장관을 이루는 밴연나무가 한그루 서있는데 승용차가 옆으로 두 대가 서 있는데도 남음이 있다.

퍼시픽 비치 호텔 1121호에 들어와 발코니 문을 열었다. 와이키키 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주민 말로 ‘분출하는 물’이라는 뜻인데 야자수 나무들 앞으로 길게 뻗은 해변이 인상적이다. 당초에는 쿠이오 비치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에 달력 그림으로 보던 생각이 떠오른다. 스노클링을 하거나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어린아이와 함께 모래섬을 만드는 가족들도 있다. 더 멀리는 작은 범선이 수십 척 그림처럼 떠 있다. 일몰과 함께 어우러진 와이키키 해변은 볼수록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해변도 모래의 유실로 해운대 해수욕장처럼 고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를 수입 해다가 수시로 깔아 놓는다고 한다. 해변과 이어진 도로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참 많다. 열 명중 한,두 명은 운동하는 사람들이다. 이 같은 인상은 숙박하는 4일 내내 계속되었다. 이곳에는 동상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듀크 카하나모쿠’ 동상인데 이 지역 출신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0년대에 첫 서핑클럽을 열어서 서핑의 아버지로 불린다고 하며 다른 하나는 쿠이오 왕자의 동상이다.

저녁때가 되자 연주소리와 함께 퍼레이드가 시작 되었다. 일본에게 공습을 받은 국치일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추념식 퍼레이드인 셈이다. 근사한 오픈카 수십 대에 그 당시 전투를 했던 노익장들이 타고 가기도 하고 군인들의 밴드와 학생들의 밴드가 연주를 하며 따라 가기도 한다.
이날부터 매번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에 들어오기만 하면 와이키키 해변을 바라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디너쇼가 예약되어 있어 서둘러 차에 올랐다. 어느 건물의 2층에 위치한 곳인데 일본과 한국의 혼혈인 사람이 동료들과 매직쇼를 한다. 동양인들이 많다.
호텔로 돌아오는 인도에는 볼거리가 꽤 있다. 새를 가지고 쇼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젊은이들이 여럿 모여 브레이크 댄스를 하기도 하며 몸을 완전히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느릿느릿 움직여 마네킹으로 착각하게 하기도 한다.

다음날 아침에는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를 방문하였다. 리무진을 타고 이동하였는데 생각보다 그리 편안하지는 않다. 운전하는 분은 해병대 출신의 이민 온 어르신인데 하와이가 살기 좋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다. 하나우마 베이는 이 해변의 기본 수칙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고서야 입장 할 수 있었는데 취사행위는 물론이고 흡연과 물고기에게 먹이 주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들이며 자연보호구역으로 스노클링과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이 가족 단위로 두, 세살쯤 되는 애기들도 있고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우도 보인다. 손주 윤기를 데리고 왔으면 신나게 뛰어 다닐 텐데 하는 아쉬운 상상을 해본다. 해변을 다니다 보니 문신을 한 백인들이 많다. 관념의 차이겠지만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2시쯤 철수하여 마라톤 엑스포장으로 이동하였다. 둥근 철골구조로 웅장하다. 호놀룰루 마라톤은 일본항공이 주관하는 대회다. 그래서 기념티셔츠에도 JAL (Japan Air Line)이라고 새겨 놓았다. 2010년 2월에 방문하였던 동경마라톤대회 전날도 그러했듯이 일본인들은 엑스포 행사를 늘 하는 모양이다. 마라톤과 관계된 물건들이 참 많다. 운동화와 유니폼, 파워 젤, 모자, 배낭, 밴드 등 별의별 물건들이 다 진열되어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몇 가지 물건을 구입하고 있는데 색지에 출전하는 각오나 응원하는 글귀를 써서 붙이는 코너가 있다. 옆지기랑 한 장씩 써서(나는 초지일관, 옆지기는 강남스타일) 들고 기념촬영을 한 후 벽에다 붙여 놓았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선상디너쇼를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300명 정도를 수용하는데 식사를 하는 도중 해가 뉘엿뉘엿 해평선 너머로 저물어 간다. 맥주와 곁들여 뷔페식으로 마치자 원주민들의 쇼가 이어진다. 손동작, 몸동작이 유연하다. 남자들은 덩치가 큰 사람도 있는데 여자들은 자그마한 편이다. 강남스타일의 노래가 나올 때는 우리도 함께 말춤을 추었다. 어느 백인 노신사는 내일 열리는 마라톤에 참가 하느냐고 묻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새벽 2시, 모닝콜 벨이 울렸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준비한 밴드를 젖꼭지에 붙였다. 지난 춘천마라톤 때 쓸려서 애를 먹었던 기억 때문이다. 로비에는 동료들이 몇 명 모여 있다. 친구인 범식내외, 해외마라톤 총무인 순남씨 내외도 출전 준비를 마쳤고 두진형 내외도 보인다. 용인서 오신 분도 스트레칭을 하며 기다리고 있다. 서둘러 식당 서라벌로 이동하여 우거지국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회장으로 이동하였다. 스타트 라인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 가로등이 있지만 아직은 사방이 어둑어둑하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다. 백인들과 일본 사람들이 많다.

사진을 몇 컷 찍고 5시에 출발하였다. 어두운 도로를 앞사람을 따라 달렸다. 두진형과 동반주를 시작하였다. 애초에 기록에 연연하지 않기로 해서 마음이 편하다. 허리에 작은 가방을 차고 카메라를 넣어 두었던 터라 길을 따라 많은 군상들의 모습과 찰라의 순간일지라도 영상에 담아 추억을 되뇌어 보리라. 10여km 지나자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한다. 주로에는 급수대가 촘촘하게 설치되어 있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진다. 이것저것 촬영을 하다 보니 저만치 앞에서 기다리는 두진형에게 미안해진다. 15km 지점에서 앞장세워 보내고 독립군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회가 많이 열리지만 유니폼은 거의 한결같이 소속을 새기고 이름을 써 넣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고 매우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길가 주택 앞에는 각종 먹거리를 가지고 나와 권유하는 가족들이 많다. 초코렛도 있고 씨리얼도 있고 사탕과 바나나도 있다. 오늘 하루는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모양이다. 밴드도 곳곳에 응원을 한다. 3,4인조 밴드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할머니도 있으며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어놓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참을 달려 25km쯤 되었을까 강남스타일 노래와 함께 율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부부인 듯한 사람과 나이가 든 여자분인데 저절로 마음이 뿌듯해진다.

음악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 누군가 올림픽 금메달 30개를 획득한 효과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만일 싸이가 미국 사람이라면 아마도 빌보드 차트에 열 번 정도는 내리 1위를 하였을 것이다.
한참을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데 엠블런스 싸이렌 소리가 들린다. 벌써 4번째 듣는 소리다. 여러 대가 배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한참을 더 달리다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아름은 됨직한 나무토막을 어깨에 메고 마주 달려오는 선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끔 직업을 홍보하기 위한 복장으로 달리는 사람은 있었어도 이런 모습은 지금껏 처음 보는 일이다. 아마도 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지은 죄가 많아 참회하는 의미라고 에둘러 생각하고는 허락도 없이 뒤에서 카메라를 들이댔다.

주로 옆 주택들은 대부분 1,2층이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가족끼리 세차를 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한다. 바다가 보이는 카할라의 고급주택들은 100억 원 정도의 가격대라고 하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달리는 내내 느낌은 공기가 참 맑고 깨끗하며 도로도 매우 청결하다는 점이다. 굴러다니는 휴지 한 장 보기가 어렵다. 다이아몬드 헤드라는 산을 오른쪽으로 마주보며 골인을 하였다. 6시간이 거의 다된 시각이다. 골인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기다리던 옆지기와 기념메달과 T셔츠를 받고 인증샷을 한 후 숙소의 맞은편 호텔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대한항공과 관계된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인데 순두부와 막걸리를 주문했다. 막걸리는 잔으로 나오는데 한잔에 5천원이라고 한다. 매우 비싼 편이지만 제일 좋아하는 술이라 거푸 두 잔을 시켜 마셨다. 한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다고 한다.

저녁에도 일정을 맞추어 놓은 곳은 한국식당이다. 아침을 제외하곤 한국 음식만 먹게 되어 현지 음식을 맛볼 기회를 잃어 버려 아쉬운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주를 시켜놓고 몇 잔 하는데 사방 벽이 완전 메모판이다. 거의가 한글이다. 한국 사람들이 방문했다는 증거다. 나도 내친김에 용지와 펜을 달라고 해서 글을 썼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이만하면 명필이고 명언이 아니겠는가!

식당 앞에는 이곳의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서 왔다. 나는 내친김에 해변이 보이는 우리 방 1121호로 모두를 초청하였다. 사실 회장이라는 엉덩이의 뿔도 달고 있었지만 해변을 바라보는 경치가 그만이기 때문에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속마음이다. 급히 좌석을 만들고 미리 준비한 안주와 술을 꺼내 준비를 하는데 두진이 형이 양주를 가지고 왔다. 9명이 모두 자리에 모였다. 와이키키 해변을 바라보며 마라톤 이야기로, 이들의 문화와 생활 이야기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나흘째 되는 월요일.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에 관광을 하기 위해 미니버스에 올랐다. 오하후섬 일주 코스다.
바람산으로 가는 도중 현지가이드인 ‘에드워드 하’ 이사는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선생께서 오랫동안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일부터 기후와 사람들의 습성까지 하와이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 준다. 그리 크지 않은 이 오하후섬도 강우량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은 코알라우 산맥 주변에는 연 5천mm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고 어떤 지역은 3백mm밖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섬에는 토질상 뱀이 살기 어렵다고 한다. 화산의 영향도 있지만 더구나 천적인 몽구스가 살기 때문일 것이다.

하 이사는 목소리가 이종환씨를 많이 닮았다. 예전 학창시절 많이 듣던‘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DJ를 맡았던 그분과 느릿느릿한 어법에서부터 다소 굵은 톤과 오랫동안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오는 것 까지 말이다.
“하 이사님, 여담이지만 하종환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꽤 있지요?”
내친김에 심술궂게 한마디 던졌다.
“네, 그렇게도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니 윤 닮았다고도 합니다.”
Ear 마이크를 장착하고 운전을 하며 다소 멋쩍다는 듯 상기된 그의 얼굴이 룸밀러에 비친다.

바람산은 ‘누우하누 팔리(Nuuanu Pali)’라고 한다. 팔리는 절벽, 낭떠러지기라는 뜻으로 하와이를 통일한 카메하메하 대왕의 군대가 오아후섬을 정복하기 위해 벌인 최후의 격전지로 이곳은 늘 바람이 강해 명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바람이 심하여 모자를 잡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절벽 끝에 서자 저 멀리 숲과 주택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다.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많은데 소나무를 닮은 잎이 더 길쭉하고 부드러운 나무가 있다. 하와이 소나무라고 하는데 뿌리가 건천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다.

하와이는 빗물을 식수로 이용하는데 보통 비가 내리면 60% 정도는 식물이 흡수를 하고 40%는 땅속으로 흘러들어 저장되는데 화산석이 정수를 하여 매우 깨끗하다고 한다. 이 빗물이 퍼 올리는 지점까지 가는데 약 25년이 소요되어 어느 곳에서나 수돗물을 마셔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니 수도배관 속의 오니 처리와 정수문제로 고민하는 우리로서는 참 부러운 일이다.

하와이는 약 110년의 이민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사탕수수농장 등에서 힘든 일을 효율적으로 시킬 목적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1862년엔 중국, 1868년엔 일본, 1878년엔 포루투칼, 1903년엔 한국이 이민을 시작하였고 우리나라는 ‘수민문’이라는 기관에서 이민자를 모집하였다고 한다.
조정래씨의 대하소설이 세편 있지만 하와이 이민에 관한 부분이 ‘아리랑’에 나온다.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던 부분인데 혹자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사실과 다른 Fiction이 좀 섞여 있다고 그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하와이에 갈매기가 없지만 있다고 상상해서 그려 놓으면 어떠랴. 사실 필자도 습작이랍시고 낙서삼아 펜을 들고 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고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작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딱히 필요하다면 그런 부분은 역사학자들에게 맡겨 놓으면 될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은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 배고픔이나 면해보자고 이억 만리 타향행을 결심하였을 것이고 그들을 태운 배는 제물포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고베항을 거쳐 1903년 1월 13일 102명이 하와이에 처음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신체검사를 합격한 86명만이 이민결정이 되었고 나머지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하루 10시간씩 노동의 댓가는 남자는 67센트, 여자는 57센트였으며 최종 7,226명이 이민을 왔고 남자 열에 여자 한명 꼴이었다고 한다.

소설에도 묘사 되었듯이 당시 원주민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결혼이 금지되어 있어 우리나라 남정네들은 이민 당시의 사진을 앞세워 얼굴도 보지 못하고 여자들이 선택해서 하와이로 건너 왔다고 한다. 따라서 그 당시‘사진결혼’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는데 막상 와서 보니 고생을 너무하여 얼굴모습이 변해서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951명이 사진결혼을 하였고 이들 중에는 정봉운(당시 42세)과 이영옥(당시18세)이란 분이 있었는데 슬하에 6형제를 두었고 그중 넷째인 ‘Robert 정’이란 의학을 전공한 분이 ‘케슬메디컬센터’를 운영하여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분으로 추앙되었는데 안타깝게도 47세의 나이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와이 대법원장을 17년간 역임한 ‘문대양(로널드 문. 2011년 퇴직)’이란 분과 13년간 시장직을 수행한 ‘헬리 김’이란 분이 한국인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탕수수 농장에서 어렵사리 살던 교포들이 한푼 두푼 모아 독립자금으로 300만 불을 고국으로 보내왔다고 하니 얼마나 대견스럽고 눈물겨운 일인가!

우리 일행은 쿠알루아 랜치(Kualoa Ranch)로 향했다. 고질라와 쥬라기 공원의 일부 배경이 되었던 삼림이 울창한 곳인데 맞은편 바다에는 모자처럼 생긴 섬이 있다.
하와이는 어디를 가도 바닷가에 음식점이 없다. 아마 보호 차원에서 법으로 금지시켜 놓은 듯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몰몬교에서 운영한다는 폴리네시안 문화센터를 방문하였다. 우리 민속촌과 비슷한 분위기다.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하와이, 타히티, 피지, 사모아, 마퀘사스, 뉴질랜드, 퉁가라는 폴리네시아 7개 섬나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인데 데릭이라는 한국인 유학생을 따라 카누를 타고 다니며 배우는 그 나라의 인사말도 재미가 있다. 뉴질랜드는 ‘키워라’, 퉁가는 ‘말로엘렐레이’, 식인문화를 가지고 있던 피지는 ‘훌라빈라까’, 타이티는 ‘요란나’ 란다.

해가 뉘엿뉘엿 진주만의 바다 저 너머로 붉은 물결을 만들며 사라진다.
하루 종일 여행으로 시장기가 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 서울가든에는 공항에서 보았던 이봉주 선수와 Travel Press를 운영하는 소재필 선생이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하는데 함께 자리한 총영사를 소개시켜 준다. 외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이런 분위기를 어찌 감추랴!
소주와 맥주를 시켜 몇 순배씩 건배를 하였다. 꿀맛이 어디 처음부터 꿀맛인가! 이 맛이 정말 꿀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 일행들을 다시 우리 방으로 초대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내일은 어차피 출국을 해야 하니 와이키키 해변과의 석별파티를 하자는 것이다.
저 멀리 어둠속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이채롭다. 해변가 공원에는 아직도 오가는 사람들이 많고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어제 주로에서 보았던 사람은 무슨 이유로 나무토막을 메고 달렸을까?’
사뭇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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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밤톨 이인효님의 댓글

밤톨 이인효 작성일

안녕하세요 윤종택님!!

유익한 여행기 올려주셔서 다음에 가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1월 알몸마라톤대회때 재천에서 뵙겠습니다.

박순남님의 댓글

박순남 작성일

!!!

윤종택님의 댓글

윤종택 작성일

고맙습니다. 대표님. 제천 알몸마라톤대회 준비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Good~

장영태님의 댓글

장영태 작성일

인천에서 출발지연되는 상황에서는 정말이지 긴장되더라구요.

그렇지만, 현지에 체류하는 기간동안 정말 날씨도 좋고,

무엇보다 선배님들이 모두 완주하신데 대해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좋은 추억의 한 때를 함께 할 수 있어 저 또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