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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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 압록강 마라톤 및 백두산 탐방기(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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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일 댓글 0건 조회 8,622회 작성일 12-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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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동 압록강 마라톤 및 백두산 탐방기(2편)
단동에서 백두산 천지를 향하여

7. 관전만(주)족 자치현을 지나 환인으로
단동서 백두산을 향해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오늘 (오후)은 단동시 환인(환런)지나 통화까지 가는 여정인데 1차 목표지인 환인까지만도 170여km인데 끝없는 산길을 뚫고 난 길이라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호산산성을 뒤로 하고 철조망이 쳐진 압록강변을 20여분 달렸을까 낮은 산 언덕에 복숭아 과수원이 무릉도원을 이루고 있었고 압록강은 갑자기 바다와 같이 넓어져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이곳은 댐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운영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 넓은 압록강에 댐을 건설할 생각을 했을까 의아스럽고 우리 4개강의 수많은 수중보들 생각이 났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개발이란 이름아래 자연을 무참히 죽이는 이 업보가 오늘날 이상기후등으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음을 이젠 아무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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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여행 도중 곳곳에 수많은 댐(수고 水庫)들을 보았는데 환인 집안등 고구려 무덤등 유적지들도 깊은 물속에 잠긴지 오래되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은 장전하구 부근에서 압록강을 벗어나 북동쪽으로 관전 만주자치현 소재지로 향하여 계속 철길과 나란이 달렸는데 지도를 보니 이 철길은 북한 평안북도 삭주, 수풍에서 건너와 본계, 심양등으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관전은 만족자치현으로 이전에는 만주족이 90%이상 살았다는데 현재는 한족이 대거 이주하였고 문화대혁명이후 만주족의 전통문화가 많이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만주족은 여진족의 별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여진족은 금 (후금 포함), 청을 건국하여 서방, 일본 제국들에 망하기 전 중국을 지배한 막강한 민족입니다.
금은 흑수말갈에서 나온 생여진 출신의 불세출의 영웅 아골타가 1115년 두만강변 산지를 근거로 세운 국가입니다.
그런데 금나라 시조가 고려 출신이란 사실은 금의 정사인 금사나 우리의 고려사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청대의 만주원류고에도
`신라왕의 성인 김씨는 수십세를 전해졌으므로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호를 금으로 한 것도 신라 왕실의 성을 따른 것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골타의 선조가 신라의 왕족으로 신라 멸망 후 고려초 여진땅으로 들어 갔을 가능성이 높고 마의태자(김일 金溢)를 시조로 하는 부안 김씨 족보에는 고려사에서 아골타의 선조일 것으로 조사해 놓은 김행(幸)를 마의태자의 아들로 기록해 두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청을 일으킨 누르하치도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금을 이은 것을 분명히 하였는데 누르하치는 백두산 북쪽에 근거를 둔 건주여진의 족장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져 여진을 토벌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여진족을 굴복시켜 후금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누르하치의 가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인데 아골타 선조의 고향인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여진족은 이후 청황실의 중국화로 국경등으로 이주한 여진족 후예는 대부분 중국사람이 되었고 고향에 있던 사람들은 남아서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요서와 요동 곳곳에 살고 있으나 이미 대부분 만주족의 말과 글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유일하게 만주어와 만주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신강 자치주 찰포 사이에 8만여명의 석백족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청이 러시아 공세를 막기 위해 이주시킨 만주의 여진 8기 일파의 후예들이라고 합니다.
(`발로 쓴 反 동북공정 454-461쪽 여진족은 우리민족이다 편)

우리와 이렇게 밀접한 만주족들이 모여사는 만족자치현은 이곳 관전에서 가까운 곳만도 본계(번시 本溪, 서북쪽), 환인, 신빈(新賓, 북쪽)이 있고 신빈에는 옛 고구려현이 있던 곳이라 환인과 더불어 더욱 애착이 가는 곳입니다.

이곳 관전은 조선 광해군때 명나라의 요청을 받고 후금과 명나라의 명청전투에 파병된 조선군 진격로이며 부차령(고려 팔도령)에서 선천군수이던 조선장수 김하응이 누르하치의 후금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곳입니다.
당시 광해군은 강홍립장군에게 누르하치에게 주는 개인 서신과 전투상황에 따라 유리한 쪽에 가담하라는 2개의 밀서를 주어 강홍립은 후금군과 싸우지 않았는데 김하응은 장수답게 싸우다가 장렬히 죽은 곳이라 정치지도자의 정세판단과 전장에서의 장수의 어려움을 생각케 하였습니다.

길양옆은 옥수수 밭의 연속이고 집집마다 고구려시절부터 내려온 부경이란 창고가 보였는데 지상에서 1m정도 높이에 마루를 깔고 옥수수를 저장하여 금방 눈에 띠었습니다. (고구려 발해역사기행 103-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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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구려 첫 도읍지 환인에서 통화로
밤늦게 혼강변의 환인에 도착하였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이 북부여의 왕자 부소에게 쫓겨 산간벽지인 이곳에 30여년간 첫도읍지삼아 살았던 곳인데 원래 이곳은 졸본부여땅으로 주몽이 재력가인 과부 소서노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세운 것입니다.

이곳 만족자치구는 청나라의 출발점이기도 한데 이곳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의 헤투하란 (영릉 永陵)이 누르하치의 후금 첫도읍지이기 때문입니다.
2년전 이곳에 왔을때 청나라 건국 기념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널려 있어 의아해 했는데 지금도 인구 30만명 중 절반이 만주족이고 우리 중국동포는 1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곳의 지명 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天帝. 하늘님)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고구려인들도 고조선 즉 단군의 후예임을 들어내고저 지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환인에는 평지성인 환인성(하고자성)과 산성인 오녀산성이 있는데 2년전 와 본 환인성은 강가의 토성으로 성벽 잔해만 남아 있었으며 오녀산성은 당시 눈 때·문에 직접 가볼 수 없어 산성 아래서 쳐다만 보았는데 환인 중심가에서 10여리 떨어진 동가강(혼강의 지류)절벽을 이용하여 웅장하게 서 있었습니다.

이 동가강은 북쪽으로 가면 혼하의 지류인 소자하를 만나므로 이전부터 북쪽의 혼하의 심양·무순과의 교역로로 이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밤늦은 시간 중국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우리를 접대하는 만주족인 듯한 예쁘장한 여종원이 중국인 주인에게 손님인 우리에게 물 심부름을 잘 못한다고 야단을 맞는 것을 보니 밥맛이 반감되었습니다.

환인에서 오늘의 목적인 통화(通化 퉁화)까지의 길도 혼강 상류를 거슬러 난 험한 산 길로 요녕성과 길림성 경계를 넘어 가는데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고 노인들만 사는 산골 마을은 일찍이 불이 꺼져 있었고 초롱한 상현달이 또렷한 별들과 함께 산하 대지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특히 머리 위 북두칠성과 서편의 찬란한 목성이 우리의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곳이 주몽등 초기 고구려인의 활동무대이고 일제시 독립투사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곳이라 생각하니 주위 산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9. 혼강가 통화에서 백산, 송강하 거쳐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자정이 넘어 통화에 도착 역전의 수수한 빈관에 드니 기적소리가 계속 요란하여 쉬이 잠을 들지 못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빈관서 역구내를 내려다보니 이곳이 철강, 의약등 산업도시이자 물류 중심지이고 교통의 요지임을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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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일제시 초기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북쪽 유하현에 이시영 이범석등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서로 군정서를 지휘한 곳이기도 합니다. 남쪽의 압록강변 집안시를 거쳐 북한의 자강도 만포, 강계로 기차가 다니니 생각보다 북한과 다시 가까이 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대망의 백두산에 올랐다가 집안까지 돌아올 긴 여정이라 새벽 5시경 일어나 6시경 서둘러 떠났는데 부처님 오신 날이라 목에 건 티베트제부처님을 모시고 마음속으로 반야심경을 읊으니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관 앞 길가 과일노점에서 체리와 산딸기를 잔뜩 사서 하루종일 심심찮게 먹었습니다.

통화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백산을 향하였는데 혼강을 따라 난 길은 줄곧 철길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혼강에 찬란히 비추고 주위의 산들이 계속 둘러 싸고 있어 너무나 상쾌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는 백두산 서파코스는 지난 10여년전부터 중국이 집중적으로 개발해 온 곳인데 저는 이코스를 연 다음해 환경운동가들과 야생화전문가 김태정선생과 처음 온 이후 다시 찾아 온 오는 길이라 감회가 새로웠고 큰 변화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연변서 떠나는 북파코스는 조선족 연변 자치구에서 관리하여 왔으나 이곳 서파는 행정구역이 같은데도 길림성 정부가 직접 관할하면서 대대적으로 개발하여 백두산 관광을 북파가 아닌 서파로 그 중심을 옮겨 우리들과 중국 동포들을 견제할 속셈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백산이나 무송현은 만주에서도 오지 중 오지였는데 백산입구에서부터 백산임업구등 대형간판을 세워 임업등 산업중심지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한글로 백두산 휴게소라 적힌 중국동포들이 운영하는 휴게소에 들려 웅담 2캡슐(1.5만원) 버섯과 지도·수건등을 사면서 서로의 정을 조금이나마 나누었습니다.

길은 계곡 녹음속을 달리며 백산산맥을 계속 올라 고도를 서서히 높혔는데 무송현, 송강하(진)들은 온통 아파트 호텔등 대형건물을 짓느라 어수선하나 매우 활기가 넘쳤고 곳곳에 도로확장 공사등으로 차 행열이 늘어서 있었으나 이전보다는 도로 사정이 훨씬 좋아져 이곳은 더 이상 오지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지나는 이 길도 우리 조상들이 활동하는 곳으로 일제하 독립군은 물론이고 옛 고구려 발해 군사들이 다니던 곳인데 이제는 중국이 백두산 등산 및 스키등 관광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으니 엄청난 변화가 불어 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송강하에서 10시경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번듯한 큰 식당에 대형 백두산 천지 사진이 인상적이었으며 이곳에 공항을 만들어 장춘, 심양등에서 수시로 비행기가 오가고 있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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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곳곳에 `장백산국제도가구`(度假區 리조트) `세계일류 산지도가 체험지`라는 대형 간판이 늘어 섰고 스키장도 만들어 중국스키대표선수들은 물론 전세계스키어들을 불러들여 전천후 관광지로 만들어 적어도 동북아의 알프스를 꿈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던 백두산 화산 폭발은 이곳에선 완전히 남의 일 같았는데 중국의 이런 갑짝스런 개발성장은 "빨리" 살아온 우리에게서 배운 것 같아 씁쓰레 하기도 하였습니다.

10. 새하얀 백두산과 천지에 올라
송강하에서 1시간여 자작나무등 울창한 숲속길을 달려 백두산 서파입구에 도착하여 셔틀뻐스로 갈아타니 드디어 백두산에 온 것이 실감났습니다.
첫 방문시는 초대소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새벽 부근 계곡에서 벌거벗고 목욕재개도 하고 거의 한나절 걸어서 서파로 오른 것을 생각하면 이번 여행은 차로 쉼없이 일사천리로 내달리고 있어 이 감격을 제대로 느낄 여유조차 없어 무진 서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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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이곳에 눈이 내렸다고 하여 단동서부터 걱정이 많이 되었다가 오늘 산에 오를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고 역시 백두산천왕님께서 우리를 반겨 맞아 주시니 서파에 올라 백두연봉과 천지를 볼 수 있으리란 기대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버스 맨 앞 좌석에 앉아 빼곡한 숲길을 지켜 보려니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조차 들었고 얼마나 지났을까 숲이 낮아지면서 드디어 천상화원으로 접어들었는데 계절이 일르고 올해는 날씨도 추워 야생화를 볼 수 없어 너무나 서운하였습니다.
이전에 왔을때는 이곳에 온통 갖가지 야생화들의 천국을 이루었고 길도 따로 나 있지 않아 맨발로 거의 종일 걸어 다녔느데 이번에는 자동차로 휙 지나칠려니 그때의 환상적인 기억이나마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자꾸만 백두산 정상을 달려가고 있는데 어느덧 숲 사이로 왼쪽부터 록명봉(지반봉) 백운봉(망천후) 청석봉(옥주봉) 제운동 와훈봉 관면봉등 눈이 쌓여 하얀 백두의 웅자가 일렬로 서듯 모습을 들어내니 가슴은 저절로 뛰기 시작하였고 카메라 샤터를 계속 눌러 냈습니다.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이며 낮은 관목 숲 지대도 지나니 뒤로는 저 아래의 만주 산하가 펼쳐져 보였고 앞으로는 굽이 굽이 도는 길 곳곳에 눈 더미가 쌓여 있으며 백두의 웅자가 선뜻 닥아 섰고
서파 정상으로 향한 길도 보이니 이제 드디어 백두의 품에 안긴 것 같았고 한시라도 빨리 저 정상에 서고 싶은 조급증이 났습니다.
어쩌면 날씨가 잔뜩 찌푸린데다 정상의 날씨가 변화무쌍함을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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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 정상이 청석봉과 제운봉 사이로 저만치 보이는 종점에 내려 서둘러 나무 계단길을 쉼없이 올랐는데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간간히 앞 뒤로 펼쳐진 장대하고 신비스런 풍경을 카메라에, 아니 가슴에 담아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저 아래서 계속 걸어 오른 청석봉 정상으로 이어진 긴 능선과 호랑이등 같이 생긴 유명한 호배능선도 보면서 잠시나마 추억에 잠겼습니다.
1200여개의 계단을 20여분만에 올라 드디어 안부인 서파 정상에 서니 온통 산하대지가 새하얀 신설로 덮여 있어 너무나 신선하고 신비하였습니다.
그리고 백두산의 최고봉인 백두봉(장군봉 병사봉)을 비롯한 2500m이상의 18개 봉우리가 제각각의 힘찬 기상으로 둘러선 그 품에 새하얀 천지가 조용히 잠들듯 누워 있어 푸근한 기분을 안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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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수교하기 전해인 1991년 고 정주영회장등 천지동우회 회원들과 처음 이곳에 온 이후 여러차례 백두에 올라 천지를 보았지만 이렇게 얼음과 눈에 덮힌 흰 천지는 처음 보니 전혀 새로운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고 당장에라도 전 웅장한 봉우리들을 한바퀴 돌며 얼싸안고 싶고 천지에 내려가서 뒹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10여년전 여름 북파코스로 이른 새벽 혼자 몰래 천지에 올라 오랫동안 천지물에 몸을 담그고 백두한아버님께 한반도 평화통일을 빌고 또 빌던 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일찌기 조선조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님은 백두산을 `곤륜(崑崙)산의 한 갈래가 동으로 뻗어 오다가 요동의 큰 들에서 엎드려 기운을 모아 동해에 닿는 곳에서 신령스럽고 숭엄하게 고개를 들고 동방의 산의 조종(粗宗)이 된 것이니 조선과 만주가 이의 권속이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한반도의 등줄기가 되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백두대간도 이런 백두의 위상을 여실히 들어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 근참기 서두에 백두산을 `동방원리의 화유(化囿)이고, 동방 민물(民物)의 최대의지요, 동방문화의 최요(最要)핵심이며, 동방의식의 최고연원이자 천산성악(天山聖岳)으로 신앙의 대상`이라 규정하며 이를 근거로 불함문화론을 주창한 것입니다. (제3편 `백두산에 오르고 집안들려 귀로에 듬`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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