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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가끔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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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달사 댓글 0건 조회 7,112회 작성일 1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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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 주는 것, 그것이 가끔 슬픔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 중의 한 마디가
“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이다.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타의에 의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고,
지금은 내 자의에 의해서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린 시절에 책을 좋아했으므로 그 비좁은 방에서
등잔불을 켜 놓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으면
아버지가 처음에는 나직하게 “이제 자야지?”
“예” 하고도 계속 있으면 조금 높은 음성으로 “어서 불 끄고 자야지?”
그래도 개의치 않고 책을 읽고 있으면,
“어서 자라니까?” 불호령 소리를 들으며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도
눈가에 아른대는 활자들,
그때의 내 경험을 카프카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경험한 한에서 사람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인간의 특성을 말소하려 한다. 이를 테면, 밤에 흥미진진한 이야기책을 한창 몰두해서 읽고 있는 소년에게 ‘그만 읽고 자야 한다.’ 는 것이다.
이 말을 정당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그렇게 독서에 몰두하는 것은 나의 특성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스를 꺼버려 나를 캄캄한 어둠 속에 있게 함으로써 나의 특성을 억눌렀다.
그 해명은 모두가 자니까, 너도 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이해가 안가기는 하지만, 믿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누구도 어린아이만큼 많은 개혁을 수행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 법이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인정할 수도 있는 이러한 억압은 도외시하더라도, 거의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이, 내 경우에도 날카로운 바늘 하나가 언제까지나 남아 있어 그 바늘은 아무리 보편적인 것을 증거로 끌어대어도 무디어지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것은 오직 내게 가해지는 부당함 뿐이다.‘ 사람들은 나의 특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적 특성에서 얻어지는 진정한 이득은 지속적인 자기 신뢰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나는 내가 가진 특성으로부터 아직 진정한 이득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행하다.“

카프카의 아포리즘에 실린 글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일 때문에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그와 똑 같은 방식으로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밤 열두시가 넘었는데, 내일 아침 출근을 해야 하는데도
컴퓨터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앉아 있는 아들에게
“이제 자야지” 응
조금 있다가 다시 “불 끄고 자야지.”
“알았어?” 그때 나는 그저 문을 크게 닫고 들어와 잠을 청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애매한 경우에는 자유를 주는 것, 그러한 상황이 너무 많은 것이
가끔 슬픔이 되어 가슴에 쌓인다.

“무엇이 자유인가.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풍자시>에서 한 말이고,
“ 내가 아는 유일한 자유는 정신과 행동의 자유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갑오년 이월 초사흘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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