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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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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세달사 댓글 0건 조회 6,491회 작성일 12-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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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과 경복궁을 다녀온 소회

금세 지난 일이 아스라할 때가 있다. 마치 몇 년이나 지난 일처럼 안개속이나 꿈결처럼 아스라해지는 것, 어제 일이 그렇다. 일요일 오전 북촌 일대를 느릿느릿 걷고 점심 식사 후 고궁박물관 옆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에서 만나기로 했다.

빛바랜 은행잎이 노랗게 잔디를 수놓은 그곳에 그 아름다운 현묘탑이 있다. 나는 그 노란 은행잎에 앉아서 탑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잎에 누워서 오래 오래 잠들고 싶었다. 저렇게 의연하게 서서 가는 세월을 셈하는 법천사지 부도가 있던 곳은 어디일까?

‘진리(법:法)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뜻을 지닌 법천사(法泉寺)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되어 법고사라고 불리던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 때 수학한 사람들이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있다. 그 뒤의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절이 폐사된 뒤 거대한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절에 쓰였던 돌은 마을 들머리의 느티나무를 둘러싼 축대가 되었거나 민가의 주춧돌 또는 담이 되기도 했으며 논밭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인 교산 허균許筠이 <원주 법천사기>를 남겼다.

“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智觀이라는 승려가 묘암墓菴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로 인하여 기축년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遊興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 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 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洞口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실로 오래되고 기이한 것이었다.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말하기를 ”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가려 낼 수가 없습니다. 하여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에도 폐허가 되었던 법천사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발굴이 시작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지금은 절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석물만 남아있는 이 절에서 당대의 제일가는 고승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열반에 들었다. 그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이 있고, 그 중에 하나가 국보 59호로 지정되어 있는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다.
원주에서 태어난 지광국사의 속성은 원씨였고, 어릴 때 이름은 수몽이었으며 법호는 해린이었다.

당대의 고승인 지광국사를 문종은 스승으로 모셨고 넷째 아들을 출가시켜 지광국사가 머무르던 현화사로 보냈다. 그가 바로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1067년에 처음 출가했던 법천사에 머무르다가 그해 10월 23일 열반에 들었다.

문종은 시호를 지광(智光), 탑호를 현묘(玄妙)라 내린 후 비문을 짓게 한 뒤 비와 함께 부도를 세웠다.

고려시대 석비의 대표작이라고 꼽힐 만큼 그 조각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고 화려하다. 지대석 위에 거북이 올라 앉아있고 긴 목을 뺀 채 서쪽을 응시하는 듯한 용머리에는 물고기 비늘이 조각되어 있으며 거북이 등에는 임금 왕(王)자가 수놓아져 있다. 비신 옆면에 운룡을 깊이 새겼는데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듯이 사실적이다.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인물’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지광국사의 행적을 적은 이 비문은 당대 명신 정유산이 찬하고 명필 안민후가 썼는데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여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이 비 옆에는 지광국사의 현묘탑이 서있었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보기보다 페르시아 풍의 이 부도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오사카에 강제 밀반출 되었다가 8.15 광복 이후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 뜰에 세워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던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부도는 전체적인 구도로 보아 신라시대 이래의 8각 원당형에서 벗어나 평면방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부도 탑 중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기단부 위에 탑사를 놓고 그 위에 옥개석과 상륜부를 쌓았는데 7층의 석재 전체에 안상, 운문, 연화문, 당한문, 불보살, 봉황, 신선, 문짝, 장막, 영락, 앙화, 복발, 보탑, 보주와 같은 온갖 화려한 장식과 무늬들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다. 특히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 풍의 창과 짧게 늘어진 커튼이 쳐져있어 이국적인 풍을 보이는 이 탑은 고려시대의 부도로서 다른 어떤 부도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탑인데 아쉽게도 기단 네 귀퉁이에 사자가 한 마리씩 서 있었다는데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부도비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비는 바라볼수록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우리말 중에 “떡 주무르듯 했다.” 또는 “흙 주무르듯 했다.”는 말이 있지만 지광국사 현묘탑비를 보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능화는「조선불교통사」에서 “원주 지광국사 현묘탑은 정교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가하였는데 경복궁 안에 쓸쓸히 서있는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먼 곳에서 법천사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 아름다운 법천사지 부도가 이곳 고궁박물관 옆에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더 은밀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지나 경복궁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통인청의 관리들이 주로 살았던 통인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잠을 자는 내내 나는 법천사지 일대만 맴돌다 깨어났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아 있는 것, 나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을 지 샐 때가 많다. 어제의 일도 결국 추억으로 남아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결에 두 뺨을 스치는 햇살에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을 것이다.

북촌과 경복궁일대 답사 안내를 진행해주신 촌철생인님과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임진년 동짓달 열아흐레

신정일 대표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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